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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초 : 한 남자 ㅣ 사랑의 기초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평점 :
<사랑의 기초>는 여러 면에서 특별한 작품이다. 일단 영국 작가 알랭 드 보통이 한국 작가 정이현과 2년 동안 함께 쓴 장편소설이라는 점이 그렇고, 서로의 원고를 읽고 메일을 주고 받으며 함께 고민해서 만들었다는 점에서 '합작'인 것은 맞지만 완성물은 각자 냈다는 점이 특별하다(알랭 드 보통은 <한 남자>, 정이현은 <연인들>을 썼다). 무엇보다도 나는 알랭 드 보통이 남성 시점에서 연애 소설을 썼다는 점이 신선했다. 얼마 전에 읽은 <우리는 사랑일까?>에서도 그랬듯이 알랭 드 보통은 여성 시점에서 연애 소설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저자가 처음으로(또는 오랜만에) 남성 시점을 택한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주인공 벤은 결혼한지 십 년 정도 되었고 여섯살, 네살배기 두 아이를 둔 평범한 가장이다. 수차례 사랑과 실연을 거듭하며 마침내 찾은 운명의 여인, 아내 엘로이즈와는 겉보기엔 문제가 없지만, 실은 몇 년 째 성관계를 거부당하고 있다. 아내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연애할 때처럼 애끓게 사랑하는 것도 아닌 미적지근한 상황을 견디다 못한 벤은 권태를 느끼고, 급기야는 결혼 전체를 부정하고 싶어진다.
부르주아는 낭만적 사랑을 결코 믿지 않을 만큼 먹고사는 문제에 짓눌려 있지도 않았지만, 성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전혀 거리낌 없이 복잡하게 얽혀들 만큼 자유롭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정서적 욕구와 현실적 한계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내야 하는 곤경에 처한 부르주아는 '영원을 서약한 단 한 사람에게 합법적으로 투자하여, 그로부터 최대의 성과를 거두고자 갈망하기'라는 빈약한 해법을 찾아냈다. (pp.31-2)
저자는 벤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지 않는다. 그보다는 결혼이 낭만적 사랑의 유일한 해답이자 최종 목적이라는 믿음을 비판한다. 결혼이란 부르주아들이 로맨스를 추구하는 정서적 욕구와 성욕을 해소하는 데 따르는 현실적 한계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 만든 타협안이라는 것이다.
불과 몇백 년 전만 해도 동서양을 불문하고 결혼이란 가문과 가문, 집안과 집안의 결합에 불과했으며, 당사자들이 서로 사랑하는지, 함께 살 마음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전통 사회가 붕괴되고 근대화, 산업화를 거치면서 사라진 가문과 집안 대신 개인을 규율하고 속박하는 도구로서 새로운 형태의 결혼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다고 외도나 불륜을 정당화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는 있는 것 같다. 잘못 하면 나뿐만 아니라 배우자와 자식, 내 가족들까지 괴롭히는 일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양육, 가사, 부부관계, 성 생활 등 결혼 생활의 단면들을 예리하게 분석한 저자의 통찰이 빛나는 책이었다. 기혼자들에게 강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