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 - 소설가 백영옥의 유행산책 talk, style, love
백영옥 지음 / 예담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어제는 1월 1일, 2014년의 첫 날을 맞이하여 생애 처음으로 해돋이를 보러 가기로 했다. 걱정과 달리 새벽에 잘 일어나는 것까지는 성공했는데, 이게 웬일, 출발 삼십 분 전부터 복부에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여자라면 누구나 겪어봤을 '그것'이다). 걷기는커녕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는 처지에 해돋이가 웬 말. 결국 가족들은 해돋이를 보러 가고 나만 홀로 집에 남아 새해 첫 날을 쓸쓸히 보냈다.


겨우 겨우 뜨겁게 달아오른 전기 담요 위에 누웠지만 진작에 달아난 잠은 쉽사리 오지 않았고, 할 수 없이 손을 길게 뻗어 책을 집어들었다. 제목은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 소설가 백영옥이 2007년에 출간한 산문집이다. 작년 언젠가, 똑같이 몸이 엄청 안 좋을 때 혼자 집에서 그녀의 산문집을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제목은 <곧 어른의 시간이 시작된다>였던가?).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똑같은 상황에서 그녀의 책을 읽게 되다니. 우연이라면 기묘하고 인연이라면 신기하다.


"선생님, 저는 사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는데요, 
어쩌다보니 소설을 쓰는 '대신' 소설 리뷰만 줄창 쓰고 있구요. 
소설가가 되기는커녕 '대신' 소설가들만 죽어라 인터뷰 하고 있거든요." (p.201)


내가 알기로 저자는 신춘문예에 13년을 내리 낙방하는 동안 인터넷 서점 북 에디터, 패션지 기자 등의 직업을 전전했다. 소설가든 북 에디터든 기자든 글을 쓰는 직업이라는 건 같지만, 원하는 글 - 소설 - 을 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그녀를 얼마나 힘들게 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정신과 의사 정혜신을 인터뷰하면서 개인적인 고민을 물었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소설인데 나는 지금 다른 글만 줄창 쓰고 있다. 이래도 되는 건가. 그러자 정혜신은 이렇게 답했다. 


"그녀는 내게 '시간'에 대해 얘기했다. 
그리고 자아가 강해진다는 건 거꾸로 자아가 없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는 불가의 화두 같은 말을 던졌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쪽으로, 물이 흐르면 흐르는 쪽으로, 
갈대처럼 물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는 단단한 자아를 가지기 위해선 스스로를 응시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과거' 때문에 괴로운 사람이라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더 깊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p.202)


패션, 쇼핑, 다이어트, 푸드, 여행, 드라마 등 트렌디한 주제 일색인 이 책이 뜻밖에 사랑스럽고 묘하게 감동적이었던 이유는 이것이다. 너무나도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소녀가, 목구멍의 무서움과 생활의 무게에 순응하고 원치도 않았던 직업을 전전하면서 부딪치고 뒹굴며 배우고 느끼다보니 어느덧 십여 년. 그새 소녀는 먼 길을 돌고 돌아 그토록 원했던 소설가의 꿈을 이루었고, 밥벌이로 쓰던 글을 부업으로 선보일 만큼 여유를 지닌 여성이 되었다. 


내가 지금 아프고 힘든 건 너무 뻣뻣해서가 아닐까. 바람이 불면 부는 쪽으로, 물이 흐르면 흐르는 쪽으로 몸을 맡기다 보면, 어느새 그녀처럼 원하는 곳에 도달해 있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지 않을까. 새해 첫 해를 보는 감동 대신 이 책을 읽은 것도 어쩌면 불행이 준비하고 있었던 행운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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