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퐁
박민규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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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인 오늘로서 만 스물일곱 살이 된 나도 열다섯 살이었던 때가 있었다. 나는 그때 겉으로는 반장, 학생회 임원, 방송부원으로 이름을 날리는 모범생이자 우등생이었지만, 실제로는 친구들과 g.o.d나 신화 같은 아이돌 그룹 이야기하는 것이 삶의 유일한 낙인 평범한 여중생이었다. 그 때는 그저 아이돌 그룹의 노래나 춤이 좋아서, 외모가 끌려서 좋아한다고 믿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하루라도 성적 걱정, 등수 걱정 안 하고 살아보고 싶던 내게 아이돌 그룹은 온갖 고민을 잊을 수 있는 피난처라서 좋아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때의 내 또래인 학생들이 EXO같은 아이돌 그룹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 걱정이나 우려보다는 안쓰러운 마음이 더 든다. 


처지는 다르지만 피난처를 찾는다는 점은 같은 열다섯 살 학생이 여기 또 있다. 이름은 '못'. 공부를 잘하지도, 외모가 잘나지도 않고, 존재감마저 없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는 못은 '모아이'라는 아이와 '쎄트로' 불량 학생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돈을 갈취당하는 게 일상이다. 한 번이라도 친구들한테 무시당할 걱정, 맞을 걱정 하지 않고 학교에 가고 싶던 못에게 어느 날 피난처가 생긴다. 그것은 여느때처럼 벌판에서 불량 학생들에게 맞고 돈을 뺏긴 못과 모아이 앞에 나타난 탁. 구. 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핑, 퐁, 핑, 퐁, 랠리를 시작했고, 탁구를 치면서 두 소년의 일상은 조금씩 전과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간다. 

 
얘야, 세계는 언제나 듀스포인트란다. 
이 세계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나는 줄곧 그것을 지켜봤단다.
그리고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탁구를 가르쳤어. 
어느쪽이든 이 지루한 시합의 결과를 이끌기 위해서였지. 
하지만 아직도 결판은 나지 않았단다. 이 세계는

그래서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곳이야. 
누군가 사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면 또 누군가가 멸종위기에 처한 혹등고래를 보살피는 거야.
누군가는 페놀이 함유된 폐수를 방류하는데, 또 누군가는 일정 헥타르 이상의 자연림을 보존하는 거지.
이를테면 11:10의 듀스포인트에서 11:11, 그리고 11:12가 되나보다 하는 순간 다시 12:12로 균형을 이뤄버리는 거야.
그건 그야말로 지루한 관전이었어. 

지금 이 세계의 포인트는 어떤 상탠지 아니?
1738345792629921:1738345792629920. 어김없는 듀스포인트야. (pp.117-8)


박민규 소설 아니랄까봐 이 소설 역시 시종일관 기이하고 환상적이다. 달라도 너무 다른 외모의 두 소년이 벌판에서 탁구를 치는 모습도 그렇고, 둘이 본격적으로 탁구를 치기로 하면서 알게 된 세크라땡 아저씨와 그의 아들들, 모아이의 주변사람들까지, 하나같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런 비현실적인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현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불량 학생들이 일방적으로 못과 모아이를 괴롭히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는 학생들과 교사들, 평범한 소년 못이 삶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는 모습은 이 사회가 청소년들에게 요구하거나 방치하는 현실과 다르지 않다. '세계는 언제나 듀스포인트'라서 절대적인 희망도, 절대적인 절망도 품을 수 없다는 세크라땡 아저씨의 말은, 안타깝지만 무엇도 제대로 해줄 수 없는 어른의 무력감을 대변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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