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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 - 인생의 모든 순간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삶, 그 축복과 고통의 시간들
질 프라이스, 바트 데이비스 지음, 배도희 옮김 / 북하우스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정상적인 기억에는 자존감을 해치거나 내게 상처를 주는 사건들을 잊어버릴 수 있는 망각이란 재능이 있어,
다시 보기를 원치 않는 과거의 모습과 인생의 순간이 떠오르는 것을 피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런 재능이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가끔은 들기도 한다.
친구와 다퉜던 모든 기억이 다 기억난다고 생각해보라.
누군가에게 크게 상처받았던 일들, 내가 저질렀던 멍청한 실수들 전부,
다른 사람에게 내뱉었던 비열하고 상처를 주는 말들 그리고 누군가가 내게 던진 아픈 말들......
무슨 수를 써도 이 모든 것으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 없다고 생각해보면 한편으로는 얼마나 절망스러운가. (p.59)
어렸을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얼굴이라든가 전에 살던 동네의 맛집 이름처럼 기억하고 싶어도 잊어버리는 일이 왕왕 있는 나로서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그저 부럽기만 한데,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의 저자 질 프라이스의 이야기를 읽고 보니 부러워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싶다. 그녀는 열네 살 이후의 모든 일을 기억하는 '자서전적 기억력'의 소유자로 과거 몇 월 며칠 무엇을 했으며, 날씨는 어땠고, 저녁식사 메뉴는 무엇이었고, 어떤 역사적 사건 또는 사고가 있었는지 등을 정확히 기억한다.
그녀의 기억력은 암기력과 달라서 공부를 잘하기는커녕 두서없이 제멋대로 떠오르는 기억 때문에 집중하는 데 방해만 되었다. 보통 사람의 뇌는 불필요한 기억은 걸러내고 필요한 기억은 재구성함으로써 자신의 적성이나 취향을 깨닫고 진로를 계획하는 데 도움을 주는데 그녀의 뇌는 그러지 못했다. 그것도 모르고 가정에서는 불화를 일으키는 못난 딸로, 학교에서는 공부도 못하고 친구들과도 잘 못 지내는 문제아로 취급받았다고 하니 가엾다. 어쩌면 그녀와 같은 증상을 가지고 있는데 스스로 특이하다고 인식하지 못하거나 주변에서 눈치채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더 있지 않을까? 책에는 그녀가 이제까지 발견된 유일한 사례라고 나오지만, 발견되지 않았을 뿐,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것 같다.
가장 안 좋은 점은 친구와의 싸움, 부모와의 불화, 실연, 남편의 죽음 등 부정적인 기억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헤어진 남자친구의 생일이라든가 남에게 했던 못된 말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게 만들었던 실수나 실패처럼 잊고 싶은 기억들을 낱낱이 기억한다면 얼마나 피곤하고 괴로울까? 썩 좋지 않은 기억력을 가진 게 다행이고, 망각이야말로 축복이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