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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검은 안개 - 상 - 마쓰모토 세이초 미스터리 논픽션 ㅣ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 / 모비딕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 거장 마츠모토 세이초가 쓴 <일본의 검은 안개>는 월간 문예춘추에 1960년 1월부터 12월까지 1년 동안 연재된 논픽션을 엮은 책이다. 연재 당시 일본 사회 각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켜 '검은 안개'라는 말이 유행어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일본의 정치, 경제, 역사, 문화 등 배경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적지 않고, 논픽션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주관적인 견해로 보이는 부분도 더러 있는 점은 아쉽지만, 일본 근현대사에 관심이 있다면 일본 사회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마츠모토 세이초 소설을 포함한 사회파 미스터리 팬이라면 미제 사건이나 다름 없는 이야기들을 소설가 특유의 상상력과 집중력으로 복원하고자 한 작가의 열정에 놀랄 것이다.
이 책의 놀라운 점 몇 가지를 살펴보면, 첫째로 논픽션, 즉 실화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마츠모토 세이초는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열두 개의 이야기는 모두 실화다. 그것도 1948년 폐점 직후에 은행에 들어가 은행원 전부에게 독극물을 마시게 한 뒤 현금과 수표를 털어 달아난 '제국은행 사건', 1949년 일본국유철도 초대 총재 시모야마가 출근 중에 실종되었다가 이튿날 기찻길에서 사체로 발견된 '시모야마 사건', 1952년 탑승자 37명 전원이 사망한 일본항공의 '목성호 추락 사건' 등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굵직한 사건들뿐이다. 더 놀라운 점은 이 사건들이 여러가지 의문점과 사회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미궁에 빠진 채 남겨졌다는 사실이다. 이제까지 수많은 범죄수사 드라마를 보고 미스터리 소설을 읽어왔지만, 이처럼 허구 같은 실화는 처음이다.
둘째, 용감하다. 이 책에 실린 사건들은 모두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1945년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미군 점령을 받고 있던 시기에 일어났다. 연재가 시작된 게 1960년 1월이니 약 9년의 시간이 흐르기는 했어도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며 미소 냉전체제였던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 때에 정치적으로 민감한 스파이 관련 사건부터 대형 비리 사건, 노조 탄압 및 불온사상 척결 광풍 같은 사건들을 공공연히 들춰내고, 신문으로 치면 다른 면에 실릴 사건들의 배후에 공통적으로 미군의 조작 내지는 음모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하는 마츠모토 세이초의 태도는 지금 보아도 무모하고 과감하다.
셋째,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이다. 이 책에 실린 마지막 사건은 다름아닌 한국전쟁이다. 일본 국내에서 벌어진 사건들만 계속 보다가 마지막에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맞닥뜨렸을 때 나의 기분은 충격 그 자체였다. 저자는 왜 이 모든 굵직한 사건들의 최종장으로 한국전쟁을 택했을까? 저자는 "지금까지 다룬 일련의 사건들은 한국전쟁이라는 절정을 향해 있는, 그것을 최종 '목적'으로 하는 복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본 내에서의 미군의 움직임이 어떻게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는지 저자는 여러가지 가설과 증거를 제시한다. 그것들이 맞고 틀린지를 떠나서 한국전쟁에 대해 한국인인 나조차도 모르는 일이 많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인해 일본의 군수공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일본경제가 크게 발전한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일본인이 전쟁에 차출되었고, 오키나와 미군 주둔이 장기화되었으며, 일본의 민주화가 백지화되고, 재벌뿐 아니라 그동안 미군이 소탕하는 데 열을 올렸던 옛 군벌 세력과 우익까지 이때를 계기로 재기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알면 알수록 참 슬픈 역사의 이면이다.
마츠모토 세이초의 작품으로는 <점과 선>을 읽은 게 유일한데, 이 책을 읽고나니 저자가 왜 고위 관료를 주인공으로 설정했는지, 철도를 주요 트릭으로 설정했는지 어렴풋이 알겠다. 아무래도 다가오는 겨울에 마츠모토 세이초를 비롯한 일본의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을 많이 읽게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