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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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그나마 꿈을 꾸는 선에서 끝났어요. 그게 아니면 어떻게든 그 꿈을 실현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죠. (중략)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꿈을 이룰 수는 없다. 그렇지만 포기하긴 억울하다. 그러니 꿈을 이룬 것 같은 기분이라도 느껴보자. 그런 기분에 젖어보자. 안 그래요? 지금은 방법이 많으니까요. 쇼코의 경우는 어쩌다 그게 쇼핑이나 여행처럼 돈을 쓰는 방향으로 나갔을 뿐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분별없이 쉽게 돈을 빌려주는 신용카드나 신용대출이 나타난 것뿐이죠." "그럼 다른 방법은 뭐가 있을까요?" 후미에는 웃었다. "음, 내가 아는 건...... 맞다, 친구 중에 성형 중독인 애가 있어요. 벌써 열 번 가까이 얼굴에 손을 댔을 거에요. 철가면 같은 완벽한 미인이 되면 인생은 100퍼센트 장밋빛, 행복해질 수 있다고 굳게 믿는 거죠. 그렇지만 아무리 성형을 해도 그것만으로는 그녀가 원하는 '행복'이 찾아오지 않아요. 고학력 고수입에 발군의 외모를 갖춘 남자가 나타나서 자기를 공주처럼 떠받들어줄 리 없죠. 그러니 몇 번이고 성형을 할 수밖에요. 이래도 안 돼? 이래도? 하면서. 같은 이유로 다이어트에 미쳐 있는 여자도 많아요." (p.344)

   

 

<이동진의 빨간책방>은 그동안 내가 몰랐던 책들을 참 많이도 알려주고, 알지만 안 읽었던 책들을 참 많이도 읽게 해주었다. 방송에 소개된 책들을 전부 읽은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읽거나 읽기 위해 구입을 했는데, 무려 일 년 하고도 몇 개월 전에 방송된 3, 4회 때 소개된 책,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를 드디어 읽었다. 같이 소개된 <은교>는 진작에 읽었는데 <화차>는 이제서야 읽은 이유는, 뭐 특별한 건 아니다. 무서울까봐. 추리물을 아예 안 읽는 건 아니지만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좀처럼 멈추기 어렵기 때문에 큰맘 먹지 않고서는 잘 안 읽는 편이다. 만약 <화차>를 읽으면 미야베 미유키의 다른 소설 - 예를 들면 <모방범>이라든가 <낙원>, 최신작 <솔로몬의 위증> 등 - 도 읽고 싶어질 게 뻔하고, 그랬다가는 주책없이 사들인 다른 책들은 내팽겨둔 채 미미여사의 책만 읽을 게 뻔하지 않은가, 뭐 이런 걱정 아닌 걱정이 앞섰다. 읽어보니 역시 잘못 읽었다 싶다. 미미여사의 다른 작품들을 읽고싶어 미치겠다.

 

 

배경은 1992년 도쿄. 휴직 중인 형사 혼마 슌스케는 아내의 사촌오빠의 아들(오촌인가?) 가즈야로부터 약혼녀가 사라졌으니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녀의 이름은 세키네 쇼코. 어렵지 않은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그녀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지만 놀랍게도 그녀의 과거 행적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진짜 세키네 쇼코'가 아니라 '가짜 세키네 쇼코', 즉 세키네 쇼코의 인생을 훔쳐서 살고 있던 또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이 사실을 밝히자 가즈야는 헛소리 하지 말라며 화를 내고 그녀를 찾는 일은 이제 그만두라고 한다. 그러나 혼마는 형사 특유의 직감으로 이 사건에는 더 큰 실체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느끼고 혼자서 사건의 심연으로 들어간다.

  

 

줄거리는 이미 '빨책'의 스포일러를 통해 알고 있는 상태였지만, 읽어보니 소설 특유의 포스와 카리스마는 변함이 없었다. 중심이 되는 사건인 세키네 쇼코 실종 자체도 기이하고 미스터리하지만, 사고로 한쪽 다리를 저는 혼마 슌스케, 그가 양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키우고 있는 아들 사토루, 겉보기엔 번듯한 은행원이지만 이기적이고 신경질적인 가즈야, 그리고 이들 주변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사건들이 묘하게 어우러지는 것도 볼만했다. 세키네 쇼코가 버블 붕괴를 맞닥뜨린 90년대 초반 일본의 흉흉한 분위기와도 잘 어울렸다. 

 

 

미야베 미유키는 사회파 추리소설로 유명하고, 그 중에서도 <화차>는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사회파 추리소설은 트릭이나 반전보다는 범죄의 사회적 동기를 찾는 일본의 미스터리 소설 장르를 일컫는 말인데, <화차> 역시 세키네 쇼코의 실종을 둘러싼 사건 그 자체의 트릭이 대단하다기 보다는 신용카드를 이용한 고금리 대출, 개인파산, 주택담보대출, 개인정보 도용, 무분별한 소비 등 자본주의가 야기한 여러가지 병폐들을 예리하고 능숙하게 지적한다. 신조 교코를 범죄자로 만든 데에는 사회의 탓이 크지만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누구나 신조 교코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범죄의 동기를 개인이 아닌 사회에서만 찾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미스터리 소설로서 <화차>가 독자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하는 방식이 어디까지나 사건 자체가 아닌 현실 사회에 대한 자각 내지는 성찰이라는 점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용카드 외에도 인터넷뱅킹, 모바일뱅킹 등 각종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결제수단이 더 많아지고, 개인정보 도용 문제도 훨씬 심각해진 지금, 나라고 신조 교코와 같은 처지에 내몰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나? 내가 만약 그녀와 같은 처지라면 어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 어떤 의문에도 시원하게 대답할 수 없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공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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