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로 산다는 것 - 우리 시대 작가 17인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글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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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작가가 되어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예를 들어 고시공부 하시는 분들 중에 어떤 사람이 이 년 만에, 삼 년 만에 됐다고 하면, 오 년 만에 된 사람은 이 년 만에 된 사람에 비해서 삼 년이나 시간이 늦어지고, 그러면 그것은 좀 시간의 낭비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설가한테는 자신의 어떤 시간도 다 소중해요. 제가 어릴 때 농사를 지으러 대관령에 올라갔다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제가 만약 학문을 했던 사람이라면 그 시기가 이 년만큼의 공백 기간일 수 있겠지요. 그 때 대관령에 올라가지 않고 제대로 공부를 해서 제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도 일찍 들어가 계속 공부를 했다면 그 시간만큼 학문도 깊어질 수 있었겠지요. 이렇듯 작가에게는 지난 어떤 시절도 그의 경험 안에 버릴 것이 없는 소중한 시간들인 것입니다. 부끄러웠던 기억들은 부끄러웠던 대로 제 마음속의 또 하나의 작품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구요. (이순원 pp.186-7)

 

 

글쓰기에 마음을 두니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음이 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 아니어서 잘 몰랐는데, 우리나라에도 좋은 소설가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발견하고 그들의 글을 찾아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비단 소설뿐만 아니라 에세이, 평론 같은 글을 읽는 것도 재미있고, TV나 라디오,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한 것을 일부러 찾아 보거나 듣는 것도 좋다. 모든 것을 돈이나 명예 따위로 환산하고 서열을 매기는 세상만 보던 내게 또다른 세상, 또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들이라서 더욱 마음이 끌리는 것 같다.

 

 

<소설가로 산다는 것>은 월간 <문학사상>에 연재된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17인의 소설가들의 창작 노트를 한데 모은 것이다. 김훈, 김경욱, 김애란, 김연수, 박민규, 이순원, 하성란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명한 소설가들의 창작론을 알 수 있다는 것도 좋았지만, 자신의 작품, 창작론에 대해 쓴다는 큰 틀 외에는 형식의 제한이나 정해진 규칙 따위가 없어서 작가들마다 제 스타일대로, 느낌대로 쓴 글을 비교하는 재미도 좋았다. 가령 (애초에 내가 이 책을 산 이유인) 김연수는 문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보이는 음악에 대한 글을 썼지만, 다 읽고나니 '역시 김연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애란은 대학 시절 학교 선배에게 이끌려 고대 앞 헌책방에서 문학에 대한 책들을 들입다 샀으나 읽기는커녕 책 사이에 낀 쪽지의 주인을 상상하는, 역시 문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보이는 엉뚱한 글을 썼다. 하지만 '역시 김애란이다!' 싶었고, 그녀가 어떤 마음과 자세로 소설을 쓰는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타로 점괘대로' 서른 즈음에 돌연 소설가로 전업한 이력을 가진 심윤경의 글도, '팔자에 없는' 소설가가 되어 골머리가 썩는다는 윤영수의 글도 좋았다. 한 사람은 점괘대로 소설가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팔자에 없는 소설가가 되었지만, 둘 다 성공했고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는 것을 보니 점괘나 팔자나 다 소용없는 것 같다. 

 

 

열일곱 편의 글 중에서 나는 이순원의 글이 가장 좋았다. 아직 유교적 근본과 옛것이 남아있던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난 작가는 어려서는 전통사회에 살았고, 자라서는 근대화, 산업화를 온 몸으로 겪었으며, 지금은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 오십년 남짓한 삶 속에서 무려 전근대와 근대, 현대 문명을 모두 겪어내느라 몸과 마음 모두 고단하고 불만이나 회한도 있을 법 한데, 작가는 그 모든 경험이 작품의 자양분이 되었다며 너그럽게 말한다. '지난 어떤 시절도 그의 경험 안에 버릴 것이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라니! 오래된 기억이나 안좋은 추억은 버리고 솎아내기 급급한 현대인들에게 이 얼마나 귀감이 되는 삶인가.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문명이 발달해도 소설이 존재하고 소설가들이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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