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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3월
평점 :
내 생각이긴 하지만 그 집 사람들은 모두 눈앞에 있는 인간을 그저 눈앞에 있는 인간으로밖에 보지 않는다. 어린아이가 아닌, 그렇다고 슈코 씨 같은 성인 여자도 아닌, 네기시 미우미로만 나를 본다. 따라서 나는 존재할 수 있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 증거(아마도)로 하라 씨는 종종 내게 소홀히 대하진 않을 테니까, 하고 말한다. 그건 하라 씨의 의도적인 말실수랄까, 일부러 그런 말을 골라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가족 모두가 솔직한 것이다. (p.269)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배경도 현실이고 등장인물도 모두 현실의 인간들인데 판타지 같다. 2007년작 <잡동사니>도 그렇다.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남편과 불처럼 뜨거운 사랑을 하고 있는 마흔다섯 살의 여인 쇼코와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온 예쁘장한 여고생 미우미. 두 사람은 각각 일흔을 훌쩍 넘긴 어머니와 이혼한 아버지와 함께한 해외 여행지에서 만나 기이한 인연을 맺게 된다. 일흔을 넘긴 할머니와 그녀의 딸, 그리고 할머니의 손녀뻘인 여고생과 그녀의 아버지, 이렇게 네 사람은 낯선 여행지에서 가족처럼 단란한 시간을 보낸다.
이들의 '가족놀이'는 여행이 끝나고 좀처럼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미우미가 기리코의 집에 찾아가면서 다시 시작된다. 다시 만난 미우미와 기리코, 그리고 기리코의 옆집을 작업실로 쓰고 있는 딸 쇼코 사이에 이번에는 미우미의 아버지가 아닌 쇼코의 남편 하라가 들어온다. 대체 이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이 기이한 인연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일까? 에쿠니 가오리 특유의 별일 아닌 듯 담담한 문체와 어울리지 않는 독특하고도 뜨거운 줄거리에 반해 한 번 읽을 때마다 책장을 덮기가 힘들었다.
이 소설은 여행지에서 쇼코와 미우미의 아버지, 미우미 이렇게 세 남녀의 삼각관계가 도쿄로 돌아온 뒤에는 쇼코와 쇼코의 남편 하라, 미우미 이렇게 세남녀의 삼각관계로 역전되는, 기묘한 구성으로 되어 있다(쇼코의 어머니 기리코 역시 쇼코와 하라 부부 사이를 질투하는 면이 보이기도 한다). 쇼코에게 아버지를 허락했던 미우미가 쇼코의 남편인 하라를 취하는 상황은 심리학적으로는 어머니에 대한 미움과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뒤엉킨 엘렉트라 콤플렉스를 연상시키기는 행동이고, 사회적으로는 불륜으로 지탄받을 행동이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미우미의 상황이 묘하게 납득이 된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생활한 미우미는 부모님 이혼 후 어머니를 따라 일본에 돌아온 후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기만 했다. 어머니는 애인이 바뀔 때마다 생활이 불규칙해졌고, 떨어져 사는 아버지 역시 미우미에게 전적으로 충실하지는 못했다.
그런 부모를 원망할 만도 하련만 미우미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부모에게도 부모 나름의 인생이 있는 거라고, 쿨하게 받아넘겼다. 그런데 어디 사람이 쿨하게만 살 수 있는가? 쿨하다 못해 차갑기까지 했던 미우미의 눈에 아내 쇼코에게 변함없이 뜨거운 사랑을 주는 남편 하라가 들어왔다. 하라의 뜨거운 사랑을, 아니 하라와 쇼코의 뜨거운 관계를 미우미가 부러워하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미우미의 마음을 알면서도 쿨하게 넘기는 미우미의 태도 역시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 되지만, 쿨한 그녀들이 왜 그토록 뜨거운 사랑에 목말라 했는지는 알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