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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책마을을 가다 - 사랑하는 이와 함께 걷고 싶은 동네
정진국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칼이 아니라 펜을 놀려 싸우는 평화로운 전쟁터는 지성과 감성이 다투는 터전이다. 거기에 자국 문화의 우수성을 주장하느라고 무리수를 두었던 애국적 필자들은 이제 인기가 시들하다. 교과서적인 명성을 날리던 저술도 죽을 쑤고 있다. 한때 박식한 사가들은 위증을 위한 증거 자료처럼 방대한 책을 써냈고, 이런 책들은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다국어로 번역되곤 했다. 그런데도 한 세기도 안 된 지금은 헐값에도 찾는 사람이 없이 비만증에 걸려 병상에 누운 거물처럼 서가에 처박혀 있다." (p.208)
"번역은 다른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것이므로 번역서가 번창하는 시대는 상호 이해에 더 다가설 수 있는 시대가 될 것이다. 상대방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그치지 않는 곳에서 상호 공존을 이야기할 수 있다. 영어만능주의가 판을 치는 우리로서는 번역을 더욱 다변화해야 하는데도 되레 경시하는 풍조야말로 불길하기 짝이 없다. 모국어와 동시에 여러 외국어를 이해하는 번역가들이 많은 사회야말로 균형 잡힌 사회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외국어 잘하기보다는 모국어 죽이기를 서슴지 않는다." (pp.270-1)
정진국이 쓴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는 제목 그대로 스위스, 프랑스, 독일, 베네룩스3국, 영국, 스웨덴, 노르웨이 등 유럽 각지에 산재해 있는 책마을을 저자가 직접 방문하고 그곳의 역사와 실정을 기록한 책이다. 책마을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파주에 위치한 헤이리 출판문화단지가 유명한데, 저자는 이런 산업적인 목적으로 건설된 출판문화'단지'보다는 마을 주민들이 직접 만들었거나 자생적인 책'마을'에 주목했다. '마을'이다보니 대부분이 책마을의 운영 방식과 각 서점의 성격, 취급하는 책의 종류 등이 주민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특색이 있다.
나라별, 지역별 특색을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영세중립국인 스위스는 예로부터 인접 국가의 사상범, 망명자들이 피난처로 즐겨 찾았던(?) 나라라서 사상에 관한 책이 유난히 많다. 예술로 유명한 프랑스와 베네룩스 3국은 화첩과 화가들의 일생을 다룬 책들이 많다. 북유럽의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나라는 동화, 환상문학 등이 발달한 나라답게 동화책, 판타지 문학책이 많다. 책마을이라고 해서 다 비슷비슷한 중고책들을 팔 줄 알았는데 각각 특색이 있어서 재미있고 신기했다. 여행기 형식인만큼 유럽에는 어떤 책마을이 있고 외국의 책마을은 어떤 모습인지 감상하기 위한 목적으로 읽는 것도 좋지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책마을'이라는 테마를 통해 책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생각해보며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저자 역시 단순히 여행지에 대한 감상만 늘어놓지 않고, 책마을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인기있는 서점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으며, 그곳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일을 하고 어떤 사람들이 손님으로 오는지 등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좋은 책이란 무엇이며, 좋은 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문화적 토양, 사회적 환경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뼈있는 말을 남겼다. 가령 시류에 편승하고 당대에만 주목받는 책보다는 영원히 사랑받을 수 있는 책이 좋은 책이라든가(), 한국의 출판문화가 더욱 발전하기 위해서는 번역문화도 바뀌어야 한다는 대목이 그렇다. 번역에 대해서는 고인이 된 요네하라 마리도 같은 논지의 주장을 한 바 있다. 우리나라 출판 시장에서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고, 그 중에서도 영어, 일본어 번역서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우리나라 출판계에, 나아가 문화계와 사회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출판계까지 갈 것도 없이, 프랑스어나 독일어, 스웨덴어 같은 유럽 지역의 언어를 모르는 내가 유럽의 책마을에 간들 얼마나 볼 것이고 얼마나 느낄 것인가! 지금 우리나라 책이 처한 문제는 책 자체나 책마을보다도, 책 이전의 국민들의 문화적, 언어적 소양의 부족, 나아가 사회적 환경의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