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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의 인생을 만들다
요시모토 바나나, 윌리엄 레이넨 지음, 황소연 옮김 / 21세기북스 / 2013년 8월
평점 :
"고통이 따르는 경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성장의 기회를 놓치는 사람입니다. 어떤 경험이든 대처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의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으로 대처하는 선택입니다. 불만을 토로하고, 울부짖고, 눈물 흘리고, 원망하고, 자신을 나무라며 지나간 일들에 집착합니다. 또 하나의 선택은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웃음을 잃지 않고, 타인의 도움에 감사하고,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며 과거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갑니다." (p.13)
"자신이 걸어가야 할 인생은 자기 자신과의 진솔한 소통, 교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머릿속의 나머지 30퍼센트를 차지하는 부분입니다. 이 30퍼센트가 참된 자기 자신입니다." (p.38) "사람들은 세상이 주입한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에 얽매여 진정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중략) 누구나 살다 보면 인생의 문제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찾아오는 이런 온갖 경험에 대처하고자 하지 않으면 더 높은 수준의 정신세계로 도약할 기회를 잃고 맙니다." (p.81)
검은 머리, 감색 교복, 검은 스타킹, 검은색 운동화...... 몸에 걸치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검은색 아니면 감색, 회색 같은 단조로운 색이었던 중학교 시절, 자주 가던 중고책방에서 책 한 권을 만났다. 빨주노초파남보. 자극적인 색상의 표지가 어찌나 마음에 들던지. 책의 제목은 <암리타>였고, 그 책을 읽고나서부터 나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팬이 되었다. 그 때가 2000년대 초반이라서 요시모토 바나나도 그 시대에 데뷔했거나 빨라봤자 90년대 중후반에 첫 책을 낸 작가일 줄 알았다. 그런데 대표작 <키친>이 무려 1988년에 나왔고, 데뷔연도는 그보다 한 해 앞선 1987년이라고 한다. 마냥 젊고 풋풋한 작가인 줄만 알았는데, 내가 첫 돌을 맞을 때 작가로 데뷔했다니... 그렇다는 것은 이제 곧 데뷔 30주년? 내가 나이든 건지, 그녀가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 건지, 세월이 빠른 건지 분간이 안 된다. 아니면 셋 다 맞거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신간 <인생을 만들다>는 그녀가 세계적인 영혼 치유 전문가 윌리엄 레이넨과 1년 넘게 주고받은 메일을 엮은 에세이다. '소설도 아니고, 갑자기 웬 영혼 치유 에세이람?' 사실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가 에세이를 내는 건 흔한 일이지만, 그냥 에세이도 아니고 영혼 치유 전문가와 개인적으로 나눈 글을 에세이로 내는 건 흔치 않은 일이거니와 조심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키친>, <암리타>, <도마뱀>, <하치의 마지막 연인> 등 그녀의 지난 작품들을 되짚어 보고나서야 결코 뜬금없는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상처와 고통, 회복과 구원에 대한 소설을 주로 써온 그녀가 영혼을 치유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윌리엄 레이넨과 나눈 메일 속에서 요시모토 바나나는 그간 소설에는 직접적으로 쓰지 않았던, 어린시절의 기억, 개인적인 어려움, 창작의 고통, 유산으로 인한 아픔 등 내밀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그 이야기들을 읽고 있자니, 일본을 넘어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작가인 그녀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아주 당연한 사실이 새삼 뭉클하게 다가왔다. 오히려 진작에 그녀의 작품 속에서 행간을 통해 읽었어야 하는 이야기들을 이제서야, 이렇게 적나라한 문장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독자로서 한없이 부끄러웠다.
이 책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녀의 고백과 질문에 대한 윌리엄 레이넨의 답변을 함께 소개한다. 사실 최근에 힘든 일이 많아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우 지쳐 있었다. 연말은 다가오는데, 올해도 이룬 것 없이 지나가는 것 같아서 허무하고 서글프고, 그런 마음을 속에 담아두면 그만인 것을 가을탄다는 핑계로 주위 사람들에게도 자주 내비쳤다. 투정에 짜증에... 내가 생각해도 참 밉상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이 반성했다. 일단 내가 하는(또는 내가 한다고 믿는) 생각의 대부분은 가족이나 친구, 연인, 직장 상사나 동료, 대중매체 같은 외부의 생각이지 '진정한 나'가 하는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뜨끔했다. 연말까지 뭐라도 이뤄야 한다는 것은 내가 정한 기준이 아닌데도 거기에 얽매여 마음상하고 주변 사람들까지 괴롭혔으니 한심하다. 아무리 안좋은 일이 있어도 스트레스를 받아도, 내가 그것을 고통이나 아픔이라고 느끼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한 그것은 안좋은 일도 아니고 스트레스도 아닌 법. 다른 작가도 아니고, 단발머리 여중생 시절에 처음 만난 요시모토 바나나의 에세이에서 이런 귀한 지혜를 얻게 되어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