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그저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는 재주를 타고난 나는 많이 쓰는 데다가 잘쓰기까지 하는,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을 보면 마냥 부럽다. 우리나라 작가 중에는 김애란이 그런 작가다. 몇 달 전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고 무척 놀랐다. 우리나라 작가 중에도 이렇게 맑고 깨끗한 문체를 지닌 작가가 있었다니! 나의 고정관념 내지는 편견이겠지만, 우리나라 소설 중에는 역사적, 정치적 색채가 짙거나, 특정 계층 또는 세대를 옹호하는 내용을 담은 작품이 적지 않은데(그런 작품들을 안 좋아하는 것은, 그런 작품 일색인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김애란의 소설은 그런 의도가 보이지 않고, 글이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문학 그대로의 문학을 한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을 읽다보면 내가 평소에 얼마나 한정적이고 안일한 단어 선택을 하는지, 남들의 문장을 따라서 쓰는지, 글을 허투루 쓰고 있는지를 여실히 느끼게 된다. 나아가 새로운 글, 나만의 글을 쓰고 싶게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글을 쓰기를 두렵게 만들기도 한다.  


2005년에 나온 김애란의 소설집 <달려라 아비>를 읽으면서 작가로 타고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느꼈다. 이 책에 실린 소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밝은' 소설이다. 작가 특유의 가족(특히 부모)에 대한 정겹고 긍정적인 묘사와 재기 넘치는 장면들이 독자로 하여금 절로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만드는 소설이 여기에 속한다.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으면서 좋다, 예쁘다, 아름답다고 느꼈던 장점들의 모태가 된 단편들로 짐작된다. 다른 하나는 '어두운' 소설이다. 어둡다고 해서, 어떤 음모나 범죄를 다룬다거나, 엄청난 비극이 등장하는 그런 류의 소설은 아니다. 김애란의 '어두움'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친숙하게 여기는 일들에서 비롯된다. 가령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날락 거리는 편의점이라는 공간을 통해 인간이 어떤 식으로 편리한 시스템과 인간성을 교환하는지를 보여주고, <영원한 화자>는 고교 동창이라며 다가온 타인을 통해 내가 특별하게 간직하고 있는 '나만의' 추억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편적이고 평범한지를 보여준다. 특히 나는 마지막에 실린 <노크하지 않는 집>이라는 작품을 잊을 수가 없다. 주인공은 다른 네 명의 여성과 함께 하숙을 하고 있다. 말이 '함께'지, 실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이다. 비좁은 방에서 주인공은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는 다른 여성들을 상상한다. 그들은 남이니까 분명 나와 다르겠지, 라는 전제를 깔고. 그러나 주인공은 어느날 추악한 진실을 맞닥뜨리게 된다. (입이 간질간질하지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나는 나, 유일한 존재'라는 당연한 생각이 흔들린다면, 나의 일상과 생활은 더 이상 그동안의 친숙하고 편안했던 모습이 아닐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 속에 나타난 작가의 어두움이다.


김애란이 쓴 책 중에서 이 책을 (<두근두근 내 인생>에 이어) 두번째로 읽은 건 라디오 광고 덕분이다. EBS 라디오는 특이하게 시보를 아나운서가 아닌 일반인 청취자들이 하는데, 그것도 그냥 시보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책에 대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같이 한다. 짧아서 대부분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언젠가 내 또래의 여성이 불면증을 고쳐준 책이라며 <달려라 아비>를 추천한 것만은 계속 기억에 남았다. 나도 가끔 불면증에 시달릴 때가 있는데, 읽으면 졸음이 쏟아져서가 아니라 잠이 오지 않는 이유를 알려주며 불면증을 치료했다(!)고 하니 어찌나 솔깃하던지. 읽어본 결과, 효과는 반반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알게 되었다. (궁금하다면 이 책에 실린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라는 소설을 읽어보시길!)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이 잠이 오지는 않는다. 생각건대 첫번째 이유는 이 책에 실린 몇 개의 작품, 특히 <노크하지 않는 집>의 결말이 (적어도 내게는) 충격적이었던 탓이다. 나의 취향, 나의 기호, 나의 가치관 등등 모든 것이 통째로 뒤집혔달까? '나'라는 개체는 대체 무엇일까? 나는 과연 무엇으로 남과 구별되고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머리가 텅 비는 듯하다. 두번째 이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이런 '타고난' 작가처럼은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자괴감 때문이다. <두근두근 내 인생>만 해도 참 좋았는데, <달려라 아비>를 보니 그 작품은 작가가 품고 있는 세계의 극히 일부분만을 보여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세계를 가지고, 이렇게 좋은 글을 쓰는 작가가 있는데, 나같은 범인이 글이 좋다고 마냥 써대서 무엇하리. 그래도 이런 소설을 읽고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이 있으니 이런 재능이라도 타고났다고 좋아해도 될까? 이래저래 오랜만에 참 마음에 드는 소설집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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