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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영하의 소설 중 <아랑은 왜?>, <퀴즈쇼>에 이어 세번째로 읽은 소설이다. <아랑은 왜?>는 대학교 교양 국어 시간에 교수님이 읽으라고 해서 읽게 된 책인데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설정이 참신하고 분위기가 애절했던 것 같다. (다시 읽어 봐야겠군!) <퀴즈쇼>는 대학교 3학년 무렵에 읽었는데 참 재미있었다. 그 때만 해도 한국소설에는 손이 잘 안 갔는데, 당시에 <퀴즈쇼>라든지 <장외인간> 등을 읽으며 우리나라 소설도 읽다가 하하 소리 내어 웃을 만큼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김연수, 김중혁, 김애란 같은 작가들을 알게 되어 꾸준히 한국소설을 찾아 읽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많이 발전했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일단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겠지만, <퀴즈쇼>처럼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는 아니다. 주인공은 살인자다. 여러 사람을 연달아 죽이고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완전범죄에 성공했다는 것에 도취되어 있다. 문제는 십 년만 되어도 변한다는 강산이 어느덧 세 번 변할 때가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는 이제 언제 마지막으로 살인을 저질렀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칠십대의 노인이 되었다. 병원에서는 알츠하이머 진단까지 받았다. 사람을 죽이고도 눈깜짝 하지 않던 사내가 이제는 어제 뭘 했는지, 누구를 만났는지도 기억을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주인공은 고장난 머리 대신 수첩에 기록을 남기기로 한다. 이것이 그의 기억법이다. 수첩에는 어제 한 일, 오늘 할 일을 적는다. 때로는 문화센터에서 배운 시를 끄적이기도 한다. 과거의 살인에 대해 쓰기도 한다. 말 그대로 '살인의 추억'을 남기는 것이다. 그러던 중 그에게 생애 마지막으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생긴다. 뒤돌아서면 이름과 얼굴조차 잊게 되는 사람. 그러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죽여 없애야 하는 사람. 주인공은 점점 더 기록에 매달리며 그에 대한 마지막 기억들을 붙들려 애쓴다.
완전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도취되어 살던 저자가 경찰도, 법도 아닌 나이의 벽 앞에 무너졌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시간에 종속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의지와는 무력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인간은 기억이라는 방식을 통해 과거의 경험을 현재에 붙들고, 미래로 전한다. 그러나 인간보다는 시간이 훨씬 강한 존재이기에, 인간의 기억은 시간이 가면 흩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 기억이라는 녀석은 완전한 존재도 못 된다. 순전히 내 마음대로 받아들이고 재구성하고 간직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억에 의존한다는 것은 원래부터 불완전한 짓이다. 뿐만 아니라 주인공은 기억 때문에 있지도 않고 가져본 적도 없는 행복을 상상했다가 상실과 이별의 슬픔까지 겪어야 했다. 시간의 무서움을 모르고, 기억에만 의존하여 산다는 것은 이렇게도 허망하고 어리석은 일이구나. 그렇다면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고, 기억이 온전히 내 것이라고 믿는 인간은 얼마나 더 어리석은 것인가. 시간의 덫에 걸린 주인공의 모습이 왠지 남같지 않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