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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페르노 1 ㅣ 로버트 랭던 시리즈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3년 7월
평점 :
댄 브라운의 소설을 처음 읽은 건 대학교 때였다. 동아리방 책장에 댄 브라운을 포함하여 당시 인기있는 작가들의 책이 많이 있었는데, 킬링타임이나 할까 해서 한 권을 빌려 읽은 게 화근(?)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일본소설을 주로 읽었던 나의 눈에 댄 브라운 소설 특유의 속도감과 장대한 스케일, 치밀한 줄거리는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그날부터 며칠 동안 수업도 듣는둥 마는둥 하며 그의 소설만 내리 읽었다. <디지털 포트리스>, <디셉션 포인트>, <다빈치 코드>, <천사와 악마> 등이 그때 읽은 소설이다. 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단연 댄 브라운의 대표작인 <다빈치 코드>와 <천사와 악마>다. 두 작품 모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영화로 만들어져 흥행에 성공했다. 내가 이 두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각각 프랑스 파리와 바티칸 공국이라는 유럽의 두 명소를 배경으로 잘 활용했고, 종교, 문화, 정치, 미술, 과학 등 여러 분야에 대한 저자의 지식과 식견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는 예술의 한 장르로서의 소설이 있다면, 작가의 세계관을 보여주기 위해 그 자체가 도구로서 활용되는 소설도 있다. 댄 브라운의 소설은 후자로서 문학성은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작가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추리소설의 형태로 짜임새있게 구성하여 독자로 하여금 연속되는 퀴즈를 풀어나가는 듯한 지적인 쾌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새로운 문학의 형태를 개척했다고도 볼 수 있다.
댄 브라운의 신작 <인페르노>는 단테의 서사시 <신곡>에 묘사된 지하 세계를 뜻한다. <신곡>은 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은 헌정과 모방, 변종과 주석을 거느린 작품으로서, 문학뿐 아니라 미술, 음악 등 다른 장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신곡>은 천국과 연옥, 지옥 이렇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페르노'는 이중에서 지옥을 뜻한다. 작가의 오랜 페르소나이기도 한 주인공 로버트 랭던 교수는 영문도 모른채 단테의 고향인 피렌체의 어느 병원 침대 위에서 며칠 동안의 기억을 잃은채 눈을 뜬다. 그곳에서 그는 의문의 사건에 휘말리고, 시에나라는 이름의 아리따운 의사와 함께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위기를 피할 수 있는 단서는 단 두 가지.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는 이상한 꿈과 병원에 실려 왔을 때 그가 했다는 말 '베소리'. 이 두 가지를 힌트로 랭던과 시에나는 피렌체와 베네치아 등지를 누비며 단테의 '인페르노'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나간다.
이 소설은 형식면에서는 작가의 전작 <다빈치 코드>와 유사하다. 로버트 랭던이 낯선 도시에서 영문도 모른채 사건에 휘말린다는 점이 비슷하고, <다빈치 코드>의 소피와 마찬가지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성 시에나가 그를 도와준다는 점이 동일하다. 랭던이 전에 했던 강연이 힌트가 된다는 점도 같다. 무엇보다도 미술과 문학, 종교의 색채가 강하다는 점이 비슷하다. 다른 점은 <다빈치 코드>가 줄거리 자체부터 예수의 후손을 찾는 내용인 데다가 <최후의 만찬>, 성배, 성전기사단 등 기독교에 관련 소재들이 많이 등장하여 기독교 색채가 매우 진한데 반해, <인페르노>는 단테의 <신곡>이 주제이기 때문에 기독교보다는 단테가 살아있던 시대의 이탈리아 문화와 당시 정치, 미술, 문학 등의 이야기가 더 많이 부각되고, 이탈리아 외에도 터키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융성한 비잔틴 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종교적 색채가 진한 <다빈치 코드>가 부담스러웠던 독자에게는 <인페르노>가 한결 쉽게 느껴질 것이고,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그리고 유럽 문화의 발전상을 풍부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용면으로는 <천사와 악마>와 유사한 점이 많다. <천사와 악마>는 교황청이 위치한 바티칸을 중심으로 종교와 과학 간의 대결을 그린 작품인데, <인페르노> 역시 중심 소재는 단테의 <신곡>이라는 문학 작품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술과 과학, 감성과 이성, 마음과 머리의 대결로 귀결된다. 나는 특히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 다음에 랭던, 시에나, 신스키 등 중심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인간의 줄기세포 조작에서부터 자연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변종을 탄생시키려는 노력에 이르기까지, 온갖 시도가 끊이지 않아요. ... 과학의 발달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할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형국이에요." (pp.361-2) 인류의 미래를 위해 과학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는 최종적으로 과학자들의 행위의 도덕적 정당성은 무엇인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같은 '철학적'인 논의로 발전한다. 과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논하는 학문이라면,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 사회과학 등 소위 '문과' 계열의 학문은 '왜' 해야하는가, 즉 목적과 의의를 논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은 그 둘이 조화를 이뤄야 하되,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전작과 유사한 부분이 많지만 <인페르노>만의 강점 역시 있다. 바로 '메시지'다. <다빈치 코드>만 해도 주제나 교훈보다는 줄거리 자체의 재미가 돋보이는데, 이번 <인페르노>는 작가가 줄거리보다도 작품을 통해 전하고픈 메시지에 더 공을 들인 작품이다. 책 말머리를 보면 <신곡>에서 유명한 구절 중 하나인 '지옥의 가장 암울한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 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이 문장은 소설 속에서도 여러번 반복되며 중요하게 다뤄진다. <인페르노>가 지옥에 관한 이야기임을 고려할 때 결국 작가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에 중립을 지키는 자'들에게 경고를 던지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도덕적 위기의 순간을 구체적으로 유전자 조작 같은 생명공학, 넓게는 과학 분야에서의 위험한 시도라고 제시하지만, 현실을 사는 독자로서 과학뿐 아닌 세상 만사에서의 도덕적인 위기의 순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나는 하루에도 수없이 직접 겪거나 보고 듣는 '인페르노' 같은 일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그저 바라보거나 입다물고 있지는 않은가? 많은 것을 반성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