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하우스
캐슬린 그리섬 지음, 이순영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캐서린 스토켓의 <헬프>를 읽을 당시 (소설 자체는 정말 재미있고 감동적이지만) 인종차별이 예전처럼 극심하지 않은 지금, 이러한 문제를 다룬 책을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궁금했다. 노예해방 전후의 흑인들의 비참한 삶을 다룬 소설은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를 비롯하여 앨리스 워커의 <컬러 피플>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소설들이 출간되었을 때만 해도 인종차별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이슈였던 반면, 지금은 흑인 대통령이 선출될 만큼 미국 내에서 흑인들의 지위가 많이 향상되었기 때문에 이런 소설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전보다 나아졌다고 해서 그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는 인종뿐 아니라 여성, 노동자, 장애인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또한 어떤 작품은 같은 주제라도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고 문제를 부여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소설이 바로 캐슬린 그리섬의 <키친 하우스>다.



원래 흑인 문학, 역사 문학 등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나 일어났음직한 일에 기반한 소설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이 소설은 소재도 소재지만, 줄거리 자체가 매우 극적이고 흥미진진하며 인물들의 캐릭터가 매우 생동감있고 개성적이어서 아주 오랜만에 밤잠도 잊고 읽었다. 소설의 배경은 노예해방 이전 미국 남부의 어느 농장이다. 제목이기도 한 '키친 하우스'는 백인 농장주 가족이 사는 '빅 하우스'에 딸린 흑인 노예들의 숙소를 일컫는다. 키친 하우스에는 백인 농장주와 흑인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여인 '벨'과 아일랜드 출신의 가난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가족과 헤어지고 기억마저 잃은 채 끌려온 백인 소녀 '라비니아', 그리고 인자한 '파파'와 너그러운 '마마 마에'의 가족들이 살고 있다. 끔찍한 일이 끊이지 않는 빅 하우스와 달리 키친 하우스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를 아끼며 화목하게 지낸다. 비록 가진 것도 별로 없고 언제 깨질지 모르는 행복을 붙잡고 있는 기분으로 살고 있는 그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순간순간의 사소한 행복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콩 한 쪽이라도 서로 나누려고 노력한다. 



키친 하우스의 정경이 따뜻하고 행복하게 보이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바깥에서 벌어지는 무시무시한 일들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의 중심 인물인 벨과 라비니아는 태생부터도 기구하지만 그들 앞에 닥친 인생은 더욱 가혹했다. 벨은 아버지를 주인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도 모자라 아버지와의 관계를 오해받아 억울한 일을 겪기도 했고, 다른 이들의 계략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떠나보내고 아이마저 잃었다. 라비니아의 삶은 더욱 가엾다. 백인이면서 같은 백인의 노예가 된 그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농락당하고 배신당했다. 그러나 그녀들은 시련 앞에 결코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고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며 소녀에서 여인으로, 어머니로 성장하고 성숙했다. 특히 라비니아는 백인이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흑인들과 살면서 흑인에 대한 편견 없이, 백지 상태의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배운 지혜로 온갖 역경을 헤쳐나갔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소녀였던 그녀가 당찬 여인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이 너무나도 대견하고 감동적이었다.


 

이러한 재미와 감동 때문에 흑인문학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흑인문학이 역사문학이나 여성문학 같은 다른 장르들과 마찬가지로 전인류의 보편적인 감성과 현대인들이 잊기 쉬운 정서를 환기시켜주며 오래오래 사랑받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비니아." 파파가 닭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닭들을 봐. 어떤 닭들은 갈색이고 어떤 닭들은 하얀색이고 또 검은색도 있어. 저 닭들이 병아리였을 때 어미 닭과 아빠 닭이 그런 걸 신경 썼을 것 같니?" 나는 파파 조지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고, 파파는 그 커다란 손을 내 머리에 얹었다. "내가 딸 하나를 더 얻은 것 같구나." 파파는 이렇게 말하고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이 이름은 아비니아고 말이야. 정말 굉장한 일이지!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해야겠다. 나처럼 운이 좋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야!"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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