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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력 - 예능에서 발견한 오늘을 즐기는 마음의 힘
하지현 지음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지치고 고단한 일상을 잘 버티다가 방전되어 버리는 순간이 있다. 일에 지쳐 모임이고 데이트고 뭐고 집에서 푹 쉬고 싶은 밤이라든지, 방바닥에 먼지가 굴러다니든 싱크대에 그릇이 쌓여있든 간에 꼼짝하고 싶지 않은 주말이라든지 말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나지 않을 때,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한 방법으로 TV만한 게 없다. 술도 좋고 음식도 좋지만 그것마저 없을 때에는 한두 시간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깔깔대고 웃다 보면 술 사러 갈 기력도 생기고 밥숟가락을 들 생각도 난다. 나같은 사람이 많은지 요즘은 공중파, 케이블 할 것 없이 예능 프로그램이 대세다.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부터 요즘 대세로 떠오른 <일밤>의 <아빠! 어디가?>, <진짜 사나이>를 비롯하여 <힐링캠프>, <런닝맨>, <해피투게더>, <인간의 조건>, <정글의 법칙>, <세바퀴>, <나 혼자 산다> 등 당장 떠오르는 프로그램 수만 해도 열 개나 된다. 나는 이 중에서 <무한도전>, <아빠 ! 어디가?> 정도만 본방사수하고 <나 혼자 산다>, <힐링캠프>, <우리 결혼했어요>는 다시보기로 보고, 종편 중에는 <신화방송>, 케이블 프로그램 중에는 그때 그때 관심있는 방송을 찾아서 보는 정도다. TV를 많이 안 보는 편인데도 고정적으로 보는 방송이 다섯 개를 넘는 것을 보면, 보통의 시청자들은 상당히 많은 시간을 TV와 함께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렇게 예능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것일까? 그 이유를 정신건강, 심리학의 관점에서 분석한 책이 바로 <예능력>이다. 저자 하지현 박사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술과 방송 활동도 열심히 하고 계신데, 쓰신 책으로는 <심야 치유 식당>, <도시 심리학>, <관계의 재구성>, <당신의 속마음> 등이 있고, <EBS 북카페>에서 '책과 사람' 코너를 담당하고 계시다. 몇 년 전 <도시 심리학>을 읽고 하지현 박사님을 알게 되었는데, 마침 내가 즐겨 듣는 <EBS 북카페>의 코너지기이기도 하셔서 신간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부터 기대하고 있었다. 마침 얼마전에는 방송에서 직접 이 책을 소개해주시기도 했는데,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니 책의 내용이 더욱 궁금해져서 (원래 신간은 금방 읽지 않는 편인데) 신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빨리 읽게 되었다.
저자는 시청자가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함으로써 얻는 마음의 힘을 가리켜 '예능력'이라고 개념화하며, 이를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예능력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나를 단단하게 지키는 힘', 즉 자존감, 자신감을 가지게 만드는 힘이다. 콤플렉스, 캐릭터 등 여러 개념이 나오지만, 그 중에서도 '장허세' 장근석으로 인해 대중문화의 새로운 키워드가 된 '허세'가 나쁘지만은 않다는 저자의 설명이 재미있었다. "세상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태클을 걸어 온다. 우리가 부족하다고, 별로라고,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 자존감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중략) 이를 위한 마음의 기술 중 하나가 바로 허세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자존감을 보호하며 진짜 자기가 다치지 않도록 아주 살짝 나를 부풀려 보는 것이다." (pp.23-4) 생각해보면 허세를 부리는 사람보다도 불편한 사람이 매사에 짜증내고 우울해하며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남에게 드러내는 사람이다. 차라리 허풍이고 과장일지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곁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훨씬 편하고 마음이 덜쓰일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에는 이렇게 자신의 치부와 단점을 떳떳하게 말하고 장점으로 승화하는 낙천적인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가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둘째는 '타인과 조화를 이루는 힘'으로서 사회성을 기르는 힘이고, 셋째는 '삶을 놀이로 만드는 힘'으로서 유희, 게임을 통해 정신적인 여유를 주는 힘이다. 특히 '타인과 조화를 이루는 힘' 부분에서 소위 '병풍'이라 불리는 멤버들도 1인자만큼 중요한 존재라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가령 <1박 2일> 시즌1의 김C나 <무한도전>에서 '못 웃기는 개그맨'이라는 캐릭터였던 당시의 정형돈, <달인>의 류담 등은 분량도 많지 않고 화면에도 잘 안 잡히는 병풍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이 들어주고 받아주지 않으면 1,2인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또한 그들이 '완충재'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에 자칫 산만하고 시끄러울 수 있는 방송에 숨통이 트이고 여유가 생겼다. 보통 사람 중에는 회사에서나 어느 모임에서나 1,2인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아무 말없이 듣기만 해야 하는 역할일 때도 있고, 노래방에서는 박수나 치고, 남의 들러리나 서야하는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역할도 하나하나 매우 중요한 것이고, 그 역할을 잘 해내면 1인자가 될 기회가 오기도 한다.
넷째는 '삶을 감동으로 채우는 힘', 마지막 다섯째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힘'이다. 마지막 다섯째 파트에서는 예능 프로그램을 독자의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그 중에서도 나는 20년 넘게 라디오 DJ로 활동하고 있는 '대한민국 라디오의 살아있는 신화' 배철수의 이야기가 감동적이었다. 그는 어느날 후배 팝 컬럼니스트 김태훈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좋아하는 일이면 오래 해. 오래 하면 너 욕하던 놈들은 다 사라지고 너만 남거든." (p.214) 나는 이 말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예능인들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경규는 신인 시절 못생긴 외모와 튀는 행동 때문에 선배, 동료들에게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 유학까지 하며 열심히 노력한 끝에 지금까지도 여러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인기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유재석 역시 전성기까지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견디며 버틴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금처럼 대중의 취향과 유행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시대에도 굳건히 살아남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그들의 열정과 노력을 우리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다면,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시간이 그저 '바보 상자'를 보다가 덧없이 흘려보낸 시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