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얼마전 70대 노인이 여자아이에게 입맞춤을 해서 벌금형을 선고받은 사건이 보도되었다. 여자아이에게 갑자기 입을 맞춘 70대 노인이라니. 언뜻 생각하기에는 징그럽고 끔찍하고, 내가 아이의 부모라도 신고를 했을 것 같다. 하지만 노인의 마음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젊고 예쁘고 순수한 것을 보았을 때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지른다거나 손을 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봄꽃을 꺾고 새싹을 밟고, 어린 아이돌 스타에게 열광하는 게 아닐까?) 다만 이 노인의 경우 그 대상이 생면부지의 타인이었고,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고 입맞춤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했기 때문에 사회적인 제약을 받은 것이다.
마침 70대 노인의 사랑과 욕망을 다룬 박범신의 소설 <은교>를 읽었다. 이 소설과 위 사건은 노인이 소녀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는다는 점은 같지만, 그 본질은 엄연히 다르다. 위 사건에서 70대 노인은 자신의 감정을 구체적인 행위로 표현했지만, 소설에 나오는 이적요 시인은 은교에 대해 연모의 감정을 품었을지언정 그것을 행동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물론 가끔 그 선을 넘을 뻔한 적은 있지만, 자신의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은교가 다치지 않도록, 그리고 자신의 깊은 사랑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애썼다. 그것이 범죄와 사랑의 차이가 아닐까.
소설에서 작가는 시인을 통해 노인에게도 욕망이 있고 사랑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현대 사회, 특히 우리나라의 노년층은 전쟁과 정치적인 혼란, 경제적인 어려움 등으로 젊은 시절에는 청춘을 마음껏 누리지 못했고, 가족을 이루고도 그 행복을 여실히 느끼지 못한 불행한 세대다. 시인 역시 지금은 사회적으로 명망을 누리고 있고 재정적으로도 어렵지 않지만, 가슴 한 구석에는 청춘을 다 누리지 못한 회환과 첫사랑에 대한 연민, 가정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이제 늙고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잊어야지 했던 그 연민과 회환을 하루아침에 터트려버린 존재가 바로 은교다. 그녀는 빼어나게 예쁘지도 않고 이렇다할 잘난 구석도 없는 평범한 여고생이지만, 시인에게는 순수, 청춘, 사랑 등 잃어버린 젊음과 행복의 결정체로 보였다. 그래서 시인은 그녀를 범하기보다 지켜주는 쪽을 택했다.
반면 이적요의 제자 서지우는 은교를 성(性)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못했다. 그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은 잘못된 욕망을 가진 자의 비극적인 최후로도 볼 수 있지만, 예술적으로 신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독하고 외곬수적인 삶을 택한 이적요 시인과 달리, 작품을 창조하는 고통을 겪지 않고도 부와 명예를 모두 누리려했던 '사이비' 예술가의 말로로도 볼 수 있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이적요 시인이 한편으로는 서지우와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바라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는 것인데, 꾹꾹 눌러왔던 그 욕망을 은교와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버릴 수 있었고, 그것을 서지우에 대한 폭력으로 해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단순히 노인의 성과 욕망을 그린 대중소설이 아니라 예술과 인생의 의미에 관한 진지한 고찰을 담은 작품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모든 예술과 인생의 선택에 뒤따르는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 갈림길에 서있었던 소녀가 바로 은교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