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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냐 추녀냐 - 문화 마찰의 최전선인 통역 현장 이야기 ㅣ 지식여행자 3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지난 2006년 5월 향년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요네하라 마리. 그녀는 칼럼니스트, 작가이기 전에 고르바초프, 옐친 등 러시아의 정상을 수행한 일본 최고의 러시아어 동시통역가이기도 했다. 1995년 제 46회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한 그녀의 출세작 중 하나인 <미녀냐 추녀냐>는 동시통역가로 활동할 당시의 에피소드와 언어에 대한 그녀의 생각과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에세이집이다. 그녀는 생전에 주로 언어와 문화, 성(性)에 관한 글을 많이 썼는데 이 책은 그 중 언어에 관한 책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언어에 관한 책으로는 이후에 낸 <차이와 사이>라는 책도 있는데, 논의의 폭으로보나 깊이로보나 <미녀냐 추녀냐>가 훨씬 다채롭고 심층적이다.
요네하라 마리의 책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저자는 책에서 통역과 번역의 공통점과 차이점, 좋은 통역의 조건, 통역의 어려움 등 통역에 문외한인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낯설고 어려워보이는 주제들을 개인적인 경험과 재미난 에피소드를 섞어 맛깔나게 소개하였다. 먼저 저자는 통역가가 외국어를 원어민처럼 무리 없이 구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일반인들의 편견에 대해 반박한다. 흔히들 통역가 하면 외국어의 단어를 모두 알고 있고, 원어민 수준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물론 그러한 경지에 다다르기 위해 오랜 시간 높은 수준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지리적, 시간적, 문화적 한계상 원어민과 똑같은 수준으로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통역가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통역가들은 어떻게 통역을 하는 것일까? 먼저 클라이언트가 요구한 상황에 필요한 단어들을 단시간내에 암기한다. 그리고 통역할 때에는 부수적인 내용은 제외하고 말하는 사람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만 전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역가의 말이 마치 자국어처럼 유창하게 들리는 이유는 바로 '문학적 소양'에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문학부만큼 세상에서 융통성이 없는 학부는 없고 철학과 문학, 특히 시문학만큼 당장의 이익에서 아주 거리가 먼 학문은 없다. 그런데 나는 통역을 하면서 회의 주제와 상관없이 여러 번 정말 몇 편 시 작품의 구절에 도움을 받아왔다." (p.79) 실용적인 지식이나 전문분야의 단어는 금방 습득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적 소양은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어린 시절 소비에트 학교의 문학 교육과 오랜 독서 경험을 통해 통역가로서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고 말한다.
외국어의 달인인 통역가들도 이렇다면, 일반인,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일찍부터 외국어 교육을 받는 것은 무용한 일일까? 저자는 그렇다고 말한다. "제 2언어, 즉 처음에 익힌 언어 다음에 익힌 언어, 대체로 외국어는 제 1언어보다 절대로 잘하지 못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일본어(모국어)를 못하는 사람은 외국어를 익혀도 못하는 일본어 수준보다 더 못하는 정도로밖에 익힐 수 없다." (p.267) 그러면서 저자는 일본 내의 영어 맹신주의와 영어교육 광풍을 비난한다. 이 부분에 있어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말을 채 익히기도 전에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부모들. 우리말 책 읽기는 안 시키면서 원어민 강사 과외는 시키는 부모들.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일까? 반성할 일이다.
이밖에도 저자는 언어와 문화의 충돌, 언어의 양극화 등 언어에 관한 중요한 이슈들을 소개했다. 그녀는 특히 소수 민족의 언어가 영어를 비롯한 강대국 언어에 의해 말살되고 있는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그녀가 생전에 그토록 열심히 문제를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그러들 기세를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면 어떤 마음일까. 남은 사람으로서 안타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