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좋아했던 사람의 물건을 간직하지 않는 편이다. 함께 찍은 사진, 그가 준 선물, 편지, 쪽지 모두 헤어지면 금방 없앤다. 이제는 그의 얼굴도, 모습도, 향기도 가물가물하고, 가끔은 어쩌면 그와 함께 했던 기억도 모두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낯선 곳, 낯선 사람에게서 그가 쓰던 물건이나 좋아했던 것을 맞닥뜨릴 때면 유령처럼 그의 기억이 나를 덮친다. 아마 완전히 떨치기 위해서는 평생이 걸리겠지... 아니, 평생이 걸려도 잊지 못할까?

 

<순수박물관>의 주인공 케말은 나와는 정반대의 습관을 가진 사람이다. 평생을 바쳐 사랑한 여자 퓌순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은 모두 모은다. 때로는 훔치는 일도 불사한다. 게다가 그렇게 모은 물건들을 모아 박물관까지 만들었다.

 

케말과 퓌순의 지독한 사랑의 시작은 이랬다. 케말은 터키의 부유한 사업가 가문의 둘째 아들로, 프랑스 유학파 출신의 여성 시벨과의 약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시벨에게 줄 선물을 사기 위해 들른 양품점에서 우연히 어린 시절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먼 친척 처녀 퓌순을 만난다. 집안 수준도 다르고, 열두살이라는 나이 차이도 있고, 무엇보다도 퓌순과의 사랑은 퓌순의 인생은 물론, 자기 인생마저 망칠 수 있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말은 퓌순에게 빠져들었다.

 

얼마전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소설과 소설가>를 읽고난 참이라서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을 읽는 독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복잡해진 탓일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많은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의 표면적인 주제는 케말이라는 한 남자의 지독한 사랑이지만, 여러 각도에서 보면 다양한 의미를 얻을 수 있다. 가령 퓌순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터키 여성과 시벨로 대표되는 현대적인 여성이 결국 둘 다 터키의 전통적인 여성관과 혼전순결에 대한 관념 때문에 희생된 점을 의미있게 볼 수 있다. 여기에 박물관이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전승국이 패전국으로부터 약탈한 물건을 트로피 삼아 전시하던 공간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책의 제목 - 순수박물관 -이 마냥 낭만적으로 느껴지지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을 주제나 의미로만 파악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이 소설은 무엇보다도 '이야기가 재미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을 읽은 건 이번이 두번째다. 몇 년 전 그의 대표작 <내 이름은 빨강>을 읽은 게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이제까지 읽은 책 중 베스트 10 안에 꼽을 만큼 <내 이름은 빨강>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역사적인 색채가 짙은 작품을 기대했던 탓에 오랜만에 읽게 된 그의 소설이 하필이면 <순수박물관>이라는, 서정적인 작품이라서 조금 실망스런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한장 한장 넘어갈수록, 마치 욕하면서도 계속 보게 되는 막장 드라마처럼, 케말의 사랑이 어떻게 진행될지 점점 궁금해져서 새벽잠을 설칠 정도였다. 1권이 끝나는 게 아쉬웠고, 2권이 있어 안도했고, 결말로 치닫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끝내 결말을 읽고나서는 한없이 허탈했고, 한동안 이 소설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을만큼 마음이 일렁였다. 읽는 내내 여러 각도로 해석해보고 의미를 끄집어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사랑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해석을 하려 애쓰는 건 내 욕심이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내 이름은 빨강>도 기본적인 서사 속에 다양한 의미가 숨어있는 작품이라서 좋아한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이야기 자체가 너무나도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어서 좋아했다. 결국 소설은 소설, 이야기는 이야기. 소설가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다. 천생 이야기꾼. 이래서 내가 파묵을 좋아하나보다.

 

 

 

p.s

 

그리고 얼마전 오르한 파묵의 책을 세 권 더 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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