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코리안 델리 - 백인 사위와 한국인 장모의 좌충우돌 편의점 운영기
벤 라이더 하우 지음, 이수영 옮김 / 정은문고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저자는 한국인 이민자 부모 밑에서 자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미국인 남성이다. 원래 직업은 '파리 리뷰'라는 문예지 편집자로, 청교도 전통을 지닌 백인 중산층 가정 출신이다. 그런 그가 엉겁결에 장모와 함께 델리를 경영하게 된다. 델리는, 우리나라로 치면 동네마다 한두개쯤 있는 슈퍼마켓(그나마도 요즘은 편의점과 대형마트, 대기업 체인 마트에 밀려나 보기가 힘들다) 비슷한 것인데, 생필품, 식료품은 물론 간단한 요깃거리나 커피 같은 음료도 판다. 초기자본이 얼마 들지 않고 기술도 필요 없다보니 외국인 이민자가 주로 운영하고, 그 중에서도 생활력 강하고 성실하기로 유명한 한인들이 많이 운영한다고 한다.  

 

몇 달 전에 처음 얘기를 꺼냈을 때 예상한 반응은 "안 돼, 벤! 그동안 받은 교육과 자란 환경을 생각해야지. 제발 부탁이다!" 같은 거였는데, 막상 부모님은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 "재미있는 경험이 될 거야. 도시 하층계급의 삶에 대한 민속지랄까, 참여연구가 되는 거지. 조지 오웰도 접시닦이로 일한 적이 있잖니. 조지프 콘래드 역시 젊은 시절 배를 타고 해외를 떠돌았고." (pp.61-2)

저자는 그때까지 백인 중산층 가정 출신답게 변화를 싫어하고 다른 인종이나 민족, 계급과 어울려 살아본 경험도 별로 없었다. 정신적인 가치만을 숭배하며, 맹목적으로 돈만 추구하는 것은 속물스럽다고 생각했다. 델리에서 일하는 것을 '재미있는 경험'으로 치부하는 그의 아버지의 말만 보아도 어떤 환경에서 자랐을지 상상이 된다. (반면 한국인 장모는 딸이 취직이 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은 많이 준대니?") 그러니 책 읽고 생각하는 일이 천직인 '글쟁이' 저자에게 델리 일은 고통 그 자체였다. 육체노동은 처음인데다가, 갑자기 다양한 배경을 가진 낯선 사람들을 상대하게 되었으니 당연하다. 게다가 투잡을 뛴다는 것이 알려져 본업인 편집자 일도 간당간당하게 되었다. 처음해보는 장사도 신통치 않은데, 델리 때문에 회사에서 쫓겨나면 어쩌나 하는 고민에 시달리는 날도 있었다.     

거기에 한국인 가정에서 생활하는 고통까지 더해졌다. 델리를 시작하면서 저자는 재정적인 문제로 아내와 처가에 얹혀살게 되는데, 일찍이 청소년기부터 독립해서 살았던 그에게 이는 엄청난 변화였다. 한국 가정이 대개 그렇듯이 가족들이 노크 없이 벌컥벌컥 문 열고, 옷은 물론 속옷까지 같이 입고, 친척들이 자주 드나들고... 미국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프라이버시'라는 것을 도무지 존중받지 못하는 환경이었다. 특히 저자를 괴롭히 것은 바로 한국음식. 한국인들이 '매 끼니를 방금 단식이라도 끝낸 것처럼 먹는'다는 문장을 읽고, 금방 과식에 가까운 식사를 끝낸 스스로를 반성했다. 하지만 한국인인 내 눈에는 미국인들이 머핀 한 개, 샌드위치 한 개로 식사를 때우는 게 신기해 보인다는 걸 알까? (내 눈에 그것들은 그저 '간식'일 뿐인데 ㅎㅎ)     

  

도서전 같은 일을 통해 조지는 편집자들이 '문학'처럼 천성적으로 고귀한 것은 내버려두어도 성공하리라는 당위만 품고 관성적으로 일하는 대신, 판매 일도 해보도록 구슬렸다. 도서전으로 내몰아 판매를 구걸하도록 만들어, 자아를 파는 것 같은 행위에도 굴욕감보다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해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pp.258-9)  

하지만 델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쌓이면서 그에게 점점 변화가 찾아온다. 그 변화가 극적으로 보여진 부분이 바로 회사 업무차 가게 된 도서전. 예전같으면 팔짱 끼고 부스를 지키고 있었을 그가 목청 높여 구독자를 유치하며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델리에 쌓여있는 물건들을 어떻게 팔면 좋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죽어있는 문예지를 사람들 손에서 살아나게 하고 싶다는 열망이 생긴 것이다. 

생각해보면 소비 행위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처럼 판매 행위도 그럴 것이다. 우리말로 '물건을 사다'라고 할 때 '사다(buy)'라는 말과 '삶을 살다'라고 할 때 '살다(live)'라는 말이 비슷한 것은 우연일까? '사는' 행위가 '살아있는' 기쁨을 준다면, 파는 행위도 그만큼 즐겁고 보람된 일일 것이다. 남에게 살아있다는 경험을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고로 무엇을 팔 때 받는 것은 동전 몇 푼, 지폐 몇 장뿐만이 아니라, 누군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기쁨, 보람, 그 짜릿함도 있다. 그러니 맥주를 팔고 담배를 파는 것처럼, 편집자로서 좋다고 생각하는 글을 남들에게 파는 것은 결코 속물적인 일이 아니라고 저자는 확신하게 되었다.    

처음 이 책 소개를 읽었을 때에는 미국인 사위가 한국인 이민자 가정에서 살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한 남자가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고, 개인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가족과 지역사회로 시각을 넓히는, 제법 깊이  있는 성장기(저자 나이가 서른이 넘었으니 성숙기라고 해야 하나?) 였다.  

나에게는 언제 어떤 곳이 귀중한 삶의 체험의 장소ㅡ 즉, '마이 코리안 델리'였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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