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영화 <도가니>. 이 영화의 원작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무렵, 비슷하게 우리나라 사법제도에 '딴지'를 걸며 나온 책이 한 권 있었다. 바로 김두식 교수의 <불멸의 신성가족>. <도가니>도 충격적이지만 이 책 또한 읽는 이의 분노를 끓게 하는 책이었는데, 이 두 권을 비슷한 시기에 연달아 읽었던 나는 폐인 상태였다. 사회, 특히 법 체계에 대한 신뢰를 거의 잃었달까...

<도가니>는 큰 화제가 된 영화인데도 차마 보지를 못하고 있던 중에 도서관에 김두식 교수의 전작인 <헌법의 풍경>이 있기에 읽었다. <불멸의 신성가족>이 법조계에 집중적으로 메스를 가한 책이라면, <헌법의 풍경>은 그보다 넓은 범위의 법 현실에 대해 비판하는 책이라서 좀 더 읽기에는 편했다.

저는 가끔 우리 사회의 문제는 정답을 지닌 사람들이 너무 많은 데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답을 몰라서 문제가 아니라, 정답을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는 이야기는 얼핏 이해가 잘 되지 않으시지요? 극단에 선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매우 행복한 일입니다. 극단에 서 있는 사람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은 언제나 옳고, 남은 언제나 틀리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 확신 속에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슬프게도 이런 분들이 누리는 자유는 다른 사람들의 불행이 됩니다. 이분들의 확신이 구현되는 세상은 다른 쪽 극단에 선 사람에게는 바로 지옥인 까닭입니다. (pp.63-4)

우리들 모두는 어려서부터 '순종'을 최고의 미덕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해보십시오. 지금도 저는 제가 왜 그 고등학교를 끝까지 다녔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학교를 박차고 나왔다면 제가 영원히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생 낙오자가 되었을까요? (p.105) 

저자는 어릴 때부터 법학보다도 인문학, 사회학에 더욱 관심이 많았고, 지금도 이류 법조인이라고 자처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법 하면 떠오르는 딱딱한 어투나 도식적인 설명보다는 철학서나 인문학서에서 볼 법한 글귀가 많다. 물론 책 제목이 <헌'법'의 풍경>인만큼 법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그 원인을 법 자체의 해석을 넘어 사회 전체의 악습이나 부정적인 사회분위기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찾으려고 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불멸의 신성가족>과 마찬가지로 법대, 사법부는 물론 군법무관 시절까지 법조계에서 저자가 직접 겪은 일화가 자주 등장하여 고발성이 짙다. (이 책보다는 <불멸의 신성가족>의 수위가 더 높다.) 이런 고발성 짙은 이야기는 경험자의 수기로서보다 드라마나 책으로 많이 나올법한데, 생각해보면 미국, 하다못해 일본만 해도 법에 관한 드라마를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도 우리나라는 법률 드라마가 별로 없다. (검사랑 연애하고, 변호사랑 결혼하는 얘기는 법률 드라마가 아니다.) 이것도 국민의 법에 대한 장벽이 높은 사례로 볼 수 있을까? 생각해 볼 일이다.

외모로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유대인들을 족집게처럼 뽑아내는 작업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아직 컴퓨터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말입니다. ... 2001년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윈 블랙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책 <IBM과 홀로코스트>를 출간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나치가 유대인들을 색출하여 분류하고, 강제 추방하고, 수용소에서 학살하는 것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IBM의 최신 기술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합니다. (카드 분류 시스템) (p.86) 

'IBM이라면 그 컴퓨터 회사?'라고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든 부분이다. 내가 무식해서 이제서야 안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몇백만명에 이르는 유대인을 학살하기 위해, 이미 20세기 초에 IBM의 기술이 쓰였다니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저자는 이를 근거로 요즘 같은 정보화 시대에 과연 나치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겠냐고 하는데, 수긍이 간다. (당장 이 글을 인터넷에 올리고 있는 내 정보자료도 어디론가에 수집되겠지...) 이 책은 이렇게 법률 외에도 다양한 배경지식을 함께 제시한 점도 좋았다.   

하지만 마냥 법 현실을 비판하기만 한 책은 아니다. 저자는 법대를 나오고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애초부터 법학에 뜻은 없었고, 그나마도 법조계의 주류인 민법이나 상법 같은 분야보다 형법, 장애인법이나 홀로코스트 같은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미국에서도 그런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법연수원을 갓 졸업했을 당시만 해도 그런 비주류의(!) 분야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선배들이 뜯어 말릴 정도였는데, 귀국 후에 보니 비슷한 뜻을 품고 이미 혁혁한 공을 세우기까지 한 후배들이 있어서 적잖이 놀랍고 부끄러웠다고 한다. 

저자는 이렇게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새로운 관심사를 가진 새로운 법률가의 시대가 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멸의 신성가족>에서도 궁극적으로 저자가 주장한 것이 법조계라는 성역을 개방하여 보다 국민에게 친숙하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책에서 이미 그런 주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쉬운 건 이 책이 나온지 벌써 7년이나 되었다는 점이다(2004년 출간). 이 책이 이제까지 여러번 화제를 낳았고 많은 이들에게 읽혔지만, 그때보다 지금의 법 현실이 나아졌는지는 의문이다. <도가니>도 영화화되어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이 책도 다시한번 화제가 되면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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