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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식탁 앞에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갖가지 물건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흰 벽, 수공 소나무 캐비닛, 조리대, 주방 기구들, 장식장에 깔끔하게 쌓인 흰 웨지우드 접시들, 메모판에 핀으로 꽂은 가족사진, 냉장고를 장식한 학교 알림장과 애덤의 그림. 그 모든 것이 나를 놀라게 했다. 공간을 채우고, 시간을 채울 것을 계속 찾아가는 과정이 축적되면 인생이 되는 게 아닐까?
'물질적 안정'이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그저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 생각하지만, 그 생각은 가짜일 뿐이고, 언젠가 새롭게 깨닫게 된다. 자기 자신의 등에 짊어진 건 그 물질적 안정의 누더기뿐이라는 걸.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소멸을 눈가림하기 위해 물질을 축적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축적해놓은 게 안정되고 영원하다고 믿도록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 결국 인생의 문은 닫힌다. 언젠가는 그 모든 걸 두고 홀연히 떠나야 한다. (p.251)
며칠전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픽처>를 다 읽고도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이해되지 않아서 어제 한 번 다시 읽었다. 벤이 변호사로서 안정된 생활을 누리다가 우연한 사건으로 인생이 역전되는 부분까지는 꿈의 소중함에 대해 말하는 책인줄 알았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가진건 꿈뿐인 처지로서, 현실에 굴복하고 꿈을 포기한 벤이 파멸하기를 은근슬쩍 바랐다. 마치 벤이, 비록 아무 가진 것 없어도 '사진가'로서의 자존심은 지키며 사는 게리를 비웃고 미워했듯이 말이다.
어쩌면 삶은 꿈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외줄타기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꿈쪽으로 몸이 쏠려 넘어진 사람을 조롱하고, 현실적이다 못해 속물이 되어버린 사람을 경멸하는 것이다. 사실 가장 어리석고 멍청한 건 꿈과 현실, 어느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외줄을 타며 불안해하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그래서일까. <빅 픽처>의 저자 더글라스 케네디는 조국인 미국보다는 프랑스에서 더 많은 사랑을 받는 작가라고 한다. 책 곳곳에 진하게 배어 있는 미국 중심의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 의식이 반미 성향이 높은 프랑스인들의 취향을 자극한 모양이다.
뜬금없이 웬 미국을 비롯한 현대 문명의 본질 얘기를 꺼냈느냐 하면 ... 미국 문화의 핵심이라고 하면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꿈'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세속적이고 대중적인 이미지로 바꾸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헐리웃 영화와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대표적인데, 그네들의 꿈은 아주 간단하다. 부와 명예를 얻거나, 여자라면 멋진 부자와 결혼하기. 그리고 그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꿈을 그러한 물질적인 개념과 동일시하게 되었다. 벤도 똑같다. 로스쿨에 들어가고, 월가의 변호사가 되고, 이상적인 가정을 만들고, 상류층만이 사는 마을로 이사를 가는게 곧 자기 꿈인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날 그는 깨닫게 된다. 그것은 성공한 변호사이자 중산층 가장의 삶일뿐, 자기 자신은 한번도 그런 삶을 원한 적이 없다는걸.
그러나 이 책을 두번째 읽은 지금은, 무엇보다도 저자는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해 후회하고 급기야는 자기혐오에 빠지는 것이 얼마나 큰 불행을 초래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꿈과 현실 사이의 외줄타기는, 어쩌면 나같은 범인(凡人)은 평생 가지고 가야 할 숙명 같은 것. 어떤 학교에 갈 것인가, 무슨 전공을 할 것인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 하는 굵직한 결정부터 위시리스트에 담긴 물건을 지를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사소한 결정까지 등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민 끝에 내린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행여 후회하고 되돌리려는 순간, 인생은 절벽 아래로 쳐박힌다. 이것이야말로 저자가 진정 전해주고 싶었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이 책의 프랑스 판 소설 제목은 <자신의 삶을 살고 싶었던 남자>라고 한다. 자신의 삶이라. 어젯밤 침대에 누워 내 인생을 누군가와 바꿀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와 바꿀지 생각해보았다. 다행인지, 아니면 무슨 자신감인지 달리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내 삶에 꽤 만족하고 있는 모양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계십니까?
그림자를 붙잡느라 실체를 잃지 않도록 조심하라. by 이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