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임팩트 맨 - 뉴욕 한복판에서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고 살아남기 1년 프로젝트
콜린 베번 지음, 이은선 옮김 / 북하우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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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아이폰이나 평면 텔레비전이나 버뮤다 행 여행티켓이나 기타 오락거리를 손에 넣을 방법을 연구하는 것보다 이런 고민을 하는 게 더 힘들다. 예를 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 하는 것들 말이다. 인생의 목적이 좋은 직장, 두둑한 연봉, 들어가 살기에 부족함이 없는 상자, 타고 다니기에 부족함이 없는 또 다른 상자라고 생각하고 그런 상자들만 있으면 무엇이든 피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은 쉽다. 심지어 앞에서 말한 고민들까지 말이다. 내가 보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민을 외면하고 싶어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하지만 가끔은 눅눅한 날 습기처럼 그런 고민들이 차오를 때가 있다. 피할 곳이 없을 때가 있다. 한국 조계종에 이런 선사가 있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내가 명상할 때 즐겨 찾는 선종이라는 종파를 미국에 전파한 분이다. 제자들은 그분을 대선사님이라고 불렀는데, 한국말로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스승이라는 뜻이었다.

아무튼 그 대선사님은 "모두들 나는 이걸 가지고 싶다, 저걸 가지고 싶다 하는데, 이 '나'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라고 종종 말했다. 세상 모든 걸 가지고 싶어하는 '나'는 어떤 존재일까?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로 갈까? 사는 이유가 뭘까? 죽는 이유가 뭘까? 이런 고민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욕구를 충족시켜야 행복해진다고 믿으면서 살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욕구는 끝이 없고, 경제는 이 끝없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거대한 기계라고 한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이 별의 자원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이다. (pp.158-9)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민을 외면하고 싶어한다.' 이 문장이 가슴을 푹 찌른다. 감정에 솔직한 삶. 나 자신과 충분히 대화하고, 내 욕구를 정확히 아는 삶을 살고 있는지 자문해본다.

 

돌이켜보면 스무살 이후의 내 삶은 나 자신을 찾는 시간이었다. 학교, 내신, 수능, 수행평가... 지긋지긋한 굴레는 다 버리고, 모범생인척, 우등생인척 하며 스스로를 감췄던 가면은 다 벗고,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내가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지 지독하게 찾아다녔다. 결국 시도했던 모든 것이 내 길이 아니라는 걸 알았고, 얄궂게도 가장 처음에 품었던 꿈이 정답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원점으로 돌아왔다. 남은 것은 흘려보낸 시간과 백수라는 타이틀 아닌 타이틀 뿐이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다. 적어도 나는 비겁하게 내 고민으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받아들였다. 많이도 망가지고 깨졌다. 통장 잔고는 언제나 비어있고, 내 이름 석자밖에 날 보여줄 것이 없지만, 그 경험만으로도 지난 6년 동안 영혼이 반 뼘은 자라지 않았나 싶다.

 

가장 최근에 내 영혼을 파고든 화두가 있으니, 바로 eco-friendly. 친환경적인 생활을 한다는 게 말이 쉽지 실천하기는 참 어렵다. 처음에는 에코백 들고 다니고, 씻을 때 물 받아서 쓰고, 가까운 거리는 차 타는 대신 걸어다니는 정도만 지켜도 뿌듯하지만,
달인 레벨(!)로 갈수록 주변 사람들로부터 '유난 떤다'는 눈총을 받는 일이 다반사에, 그것도 모자라 내가 아무리 아껴 쓰고 노력해도 남들이 펑펑 쓰면 도로 아미타불 아닌가 싶은 생각에 허무한 마음만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 일 년 동안 뉴욕 한복판에서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고 살아보겠다고 선언한 남자가 있다. 모든 문명을 거부하고 환경에 자극을 주지 않고 살아보겠다니. 일찍이 헨리 데이빗 소로가 1세기도 더 전에 시도했던 일이기는 하지만(<월든>) 콜린 베번의 도전은 차원이 다르다.  소로는 컴퓨터도 없고 휴대폰도 없었던 18세기 중엽에 문명의 손이 닿지 않은 산골 구석에서 지내기라도 했지, 온갖 유혹이 산재한,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도시 뉴욕에서, 그것도 쇼핑 중독 아내와 기저귀도 안 뗀 딸이 있는 남자가 엘리베이터, 자동차, 비행기, 종이신문, 커피, 패스트푸드, 텔레비전, 심지어는 종이기저귀까지 다 포기하고 산다는 건 뉴욕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 아니 현대인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무모한 도전이었던지, 도전을 선언한 후에도 콜린은 한참동안 고민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피자 한 조각을 사먹고 싶어도 딸려 나오는 종이 포장(=쓰레기) 때문에 사먹을 수가 없지, 아내와는 싸우기 일쑤, 딸이 쓰는 종이 기저귀를 천 기저귀로 바꿨다가 집안 바닥을 아이 오줌으로 온통 적신 적도 있다. 언젠가 파리에서 본 근사한 그물 장바구니 하나를 살까 했더니 이것도 쓸데 없는 소비를 하는 것 같아 그만뒀다. 슈퍼마켓에서 비닐봉투 대신 (그것도 콜린이 직접 가져온!)유리병에 담아달라고 부탁해도 점원은 유난 떤다며 흉을 봤고, 살이 쪽쪽 빠지도록 걸어서 통근하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계단으로 다녀도 매연 뿡뿡 뿜는 대형 자동차는 그를 비웃는 양 잘만 달렸다. 남들은 혀빠지게 아껴 써도 나 혼자만 '노 임팩트'여서는 '딥 임팩트'같은 위기가 전지구에 닥치는 건 시간 문제ㅡ 그런데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 거지? 이런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내가 보기에도 이건 답이 없다.

   

   
  바라던 걸 손에 넣으면 욕구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다음 대상으로 넘어간다. 어떻게 보면 "이걸 가지고 싶다"거나 "저걸 가지고 싶다"는 말은 잘못된 표현이다. "아프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냥 "가지고 싶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다. 나는 그물 장바구니가 생기면 또 다른 게 가지고 싶어질 것이다. 우리의 경험 밑바탕에 욕구가 자리잡고 있고 하루의 변덕스러운 욕망을 충족시켜도 욕구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다람쥐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p.101)  
   

 

그래도 콜린은 포기하지 않았다. 환경문제를 먼저 인식하고 고민한 사람들의 책을 구해 읽고, 동양철학에서 답을 구했다. (특히 한국 불교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그가 한국에 와서 한국의 '중생'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환경을 넘어 소비,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로 생각을 확장시켰다. 그의 접근법대로 환경에 대한 고민은 결국 나에 대한 고민이고, 소비에 대한 생각도 결국 나에 대한 생각이다. 환경이 무엇인가. 내가 살고 먹고 배출하고 순환시키는 장(場)이다. 환경을 더럽히는 건 나를 더럽히는 것이고, 환경에 무관심한 건 곧 자신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소비는 또 무엇인가. 내가 살고 먹고 입고 즐길 것을 구입하는 행위다. 내가 구입한 것이 나를 규정하고 표현한다. 아무거나 '사는(buy)' 것은 아무렇게나 '사는(live)' 것이고, 쓸데 없이 '사는' 것은 쓸데 없이 '사는(live)' 것이다.

 

콜린은 현대인들이 근본적으로 '나'에 대해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욕구를 알지 못하고 주관 없이 소비한다고 지적한다. 만약 나에 대해 잘 알고, 내가 뭘 원하고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답을 정확히 알고 있다면 꼭 필요한 것만 구입하고 더 구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나야 진작에 명품족, 된장녀는 (시도해 본 적도 없고 능력도 안 되지만) 내 팔자에 없다는 걸 알았으니 앞으로는 비록 반쪽자리가 되더라도 eco-friendly consumer로 살아볼까 싶다. 그나마도 과소비하는 건 책과 음식뿐이지만(^^;;;), 잘만 하면 '노 임팩트'까지는 못 돼도 '딥 임팩트'는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콜린의 노 임팩트 맨 '프로젝트'는 끝이 났지만,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생활은 현재진행형이다. 그와 그의 프로젝트를 유명하게 만든 블로그(http://noimpactman.typepad.com/)도 여전히 업데이트 중이다. (메일링 서비스를 구독하려고 했는데 이미 구독자 한도가 다 차서 안 되는 모양이다. 번거롭더라도 홈페이지에서 직접 그의 소식을 들어야겠다.) 

 

  

실천은 그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올바른 것이니라.
그대는 실천의 결과를 목적으로 삼지 말 것이며, 나태에 심취하지도 말라.   

- 인도의 대서사시 바가다드 기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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