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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끝에 내가 있다 - CNN 앵커, 앤더슨 쿠퍼의 전쟁, 재난, 그리고 생존의 기억
앤더슨 쿠퍼 지음, 채인택.중앙일보 국제부 옮김 / 고려원북스 / 2010년 2월
평점 :
중, 고등학교 시절 나의 꿈은 언론인이나 외교관이 되는 것이었다. 세계를 누비고,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고, 글을 쓰는 일이 많다는 점에서 두 직업은 닮았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경쟁률의 '고시'를 패스해야 하고, 패스하더라도 무시무시한 학연과 혈연의 벽을 뚫기는 더 어렵다는 점도...)
'살아있는 전설' CNN 앵커 앤더슨 쿠퍼가 쓴 <세상의 끝에 내가 있다>를 읽으면서 잊고 있었던 그 때의 꿈이 떠올랐다. 세계의 각종 현장을 누비며 취재하고 기사를 쓰고 보도하며 삶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얼마나 멋진가! 하지만 앤더슨 쿠퍼의 고백에 따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그에 따르면 저널리스트는 삶의 벼랑 끝에서 죽음을 목도한 순간에도 그 죽음에 슬퍼하고 추모할 겨를도 없이 시청률이 더 잘 나오는 화면, 더 잘 팔리는 이야기는 무엇일까를 고민해야 하는 직업이고, 그 때마다 그는 영혼을 버리고 울음을 잃어버렸다.
처음 기자가 됐을 때,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취재를 하는 시늉은 해지만 마음을 담지는 않았다. 기술적인 문제에 집중했으며 이야기 전개나 플롯 같은 것들을 더욱 중시했던 것이다.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고 인터뷰를 했지만 '나'라는 존재는 그 속에 없었다. (p.51)
저널리스트가 되기 전 그의 배경은 화려하다 못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외조부가 미국의 철도왕인 코넬리우스 밴더빌트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유명한 방송인이자 디자이너였다고 한다. 부모님이 개최하는 파티에는 무려 찰리 채플린, 앤디 워홀 같은 유명인들이 바글바글했다고 하니 더 말 할 필요가 없다. 그 또한 예일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고, 공부뿐 아니라 스포츠도 만능인 다재다능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화려하기만 했던 그의 인생에 어느 순간부터 깊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급기야 대학 졸업 무렵에는 두 살 위의 형이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뉴욕 펜트하우스 창문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영혼을 채워줄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이 바로 저널리즘이었고, 남들이 모두 만류하는 전쟁터, 재해지에서 그는 되레 살아있음을 느꼈다.
책에는 그가 젊은 시절부터 전쟁터와 재해지를 누비며 취재한 기록들과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나온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전쟁터에서 마주친 시체 무덤들, 그리고 비극적인 현실에 절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취재하며 잊고 싶어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 앤디슨 쿠퍼의 개인적인 고통이 다시 살아나고 그를 괴롭게 만드는 과정이 생생히 전해져왔다. 성공적인 저널리스트로만 보였던 그에게 이런 아픔이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병적으로 일에 매달렸다니. 지독히도 까만 어둠이 있기에 성공이 더욱 밝게 빛나 보인다는 진리를 그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항상 내가 보도하는 기사들이 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생각해왔다. 이를테면 내 기사를 보고 누군가가 실천에 나선다거나 하는... 지금은 이런 확신도 약해졌다. 한 곳의 사정이 나아지면, 다른 곳의 사정이 나빠진다. 지도상의 위치만 끝없이 바뀔 뿐이다. (p.147)
하지만 그가 언제까지나 '영혼이 없는 저널리스트'로 임한 것은 결코 아니다. 국내직을 맡아 한동안 앵커로서 승승장구하며 지내던 그는 2005년 카트리나 대재난 보도를 계기로 전쟁터를 누비던 젊은날의 열정을 떠올렸다. 저널리즘, 언론이 아무리 보도를 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극적인 소식이 좀 더 알려져 지원을 받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 민중들이 존재한다. 그들을 위해 다시 현장에 귀를 기울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런 그의 열정이 전해졌는지 그의 방송은 시청률이 400%나 상승했고, 그는 명실상부한 미국 최고의 인기 앵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만약 원조가 이루어지지 않고, 관심이 모아지지 않을 경우 350만 명의 니제르인이 굶기 시작할 것이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이 꼭 그렇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먼저 굶어죽기 시작한다. 그러면 몇몇 기자들이 먼저 관심을 갖는다. 그들이 현장에서 찍어 보낸 사진들이 몇몇 대형 방송국의 관심을 끌게 된다. 대형 방송국의 전파를 타면 지원이 시작된다. ... 비극이라면, 니제르에서는 아직 시스템이 돌아갈 만큼 충분히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몇천 명의 아이들이 죽는 것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p.136)
참고하면 좋을 기사 [중앙일보] 아이티 현장 취재 중 소년 구해낸 영웅 미국 최고의 인기 앵커 앤더슨 쿠퍼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4220026&cloc=olink|article|default
책을 읽으면서 '지독한 워커홀릭이고, 한 가지 일에 깊이 몰입하며, 생각이 많고,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점으로 보아 그 또한 나처럼 내성적인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이앤 소여를 비롯하여 미국 저널리스트 중에 내성적인 사람이 많은 것 같다. (한 가지 분야에 진득하게 몰두하고 장기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건 외향적인 사람보다 내성적인 사람에게 더 맞는 일일테니...) 그는 또한 예일대 졸업 후(예일대 졸업장을 가지고도!) 방송사 입사에 줄줄이 낙방한 경험이 있다. 그 방송사들은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했을까! 개인적인 비극을 안고서도 타인의 비극에 공감하고자 여전히 세상의 끝에 서있는 앤더슨 쿠퍼. 앞으로의 그의 행보가 너무나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