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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매장
팡팡 지음, 문현선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4월
평점 :

중국 소설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이 있었다. 위화, 모옌, 옌롄커 등 그동안 읽은 중국 작가의 소설 대부분이 중국의 근현대사를 다루고 있고, 대체로 어둡고 참혹한 내용이 많아서 읽는 내내 괴로웠던 기억이 강렬했던 탓이다. 그래서 이 책이 SNS에서 화제가 될 때에는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누군가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말하는 걸 듣고 읽어보기로 결심했다. 읽어보니 과연 올해의 책으로 고려할 만하다. 중국의 1950년대 토지개혁을 다루고 있고, 어둡고 참혹한 내용이 나오는 것은 맞지만, 내용을 풀어가는 방식이 그동안 읽은 중국 소설이나 여느 역사 소설보다는 오히려 히가시노 게이고 풍의 추리, 미스터리 소설에 가까워서, 이 장르의 팬인 사람으로서 끝까지 흥미를 가지고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소설은 한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여인은 과거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해서, 의식을 잃고 강물에 떠내려온 그를 구해준 의사가 붙여준 이름으로 살고 있다. 그렇게 얻은 이름이 딩쯔타오였다. 몇 년 후 딩쯔타오는 자신을 구해준 의사와 결혼했고 칭린이라는 아들도 얻었다. 그러나 칭린이 학교에 들어갈 즈음 의사가 사고로 죽었고, 딩쯔타오는 가정부로 일하며 혼자서 아들을 키웠다. 칭린은 잘 자라서 한 회사의 지사장 자리에 올랐고, 효심이 깊은 그는 어머니를 위해 대저택을 구입했다. 공교롭게도 그 때부터 딩쯔타오가 정신을 놓아버렸고, 어머니 간병과 회사 일을 병행하며 바쁘게 지내던 칭린은 사장의 아버지인 류진위안이라는 노인과 대화를 나누다 마음에 걸리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 모든 것들 때문에 칭린은 어머니가 낯설게 느껴졌다. 어제는 자신이 어머니에 대해 잘 모른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의 어머니, 인사불성이 된 어머니가 어떤 일로 인해 엄청나게 변해버린 듯했다. 더이상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어머니가 아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 비밀을 간직한 사람 같았다. 그 비밀 때문에 어머니가 거대한 책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표지만 알았을 뿐 내용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책. (98-99쪽)
앞에도 썼듯이 이 소설은 전개 방식이 추리, 미스터리 소설 같다. 칭린은 건축설계를 전공한 기업인으로 탐정이나 형사와는 거리가 먼 전공과 직업을 가졌으나, 이 소설에서는 어머니의 과거라는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탐정 역할을 수행한다. 칭린은 어머니의 과거가 이전에 어머니가 말한 영문 모를 단어들,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일기, 주변 사람들의 기억(증언) 등과 관련이 있다고 짐작하고 이들을 '단서'로 활용해 진실에 다가간다. 대학에서 건축을 가르치는 친구 룽중융의 연구를 돕다가 우연히 어머니의 고향과 어머니가 살았던 저택을 찾는 행운을 만나는데, 이 저택은 사실상 '사건 현장'이다. 그렇다면 '사건 현장'에 있었던 유일한 생존자인 어머니는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 그런데 이걸 아는 게 그렇게 중요할까.
소설의 마지막에서 칭린은 진실을 완벽하게 아는 것과 현실을 유지하는 것 사이에서 고민하다 후자를 택한다. 어머니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명확하게 아는 것이 현재의 자신에게는 불필요하고, 어차피 세상에는 객관적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들이 알아낸 진실이 정답인지도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칭린과 함께 사건을 조사한 룽중융은 끝까지 진실을 추적하고 기록으로 남기기를 원한다. 그에게는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보다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칭린의 선택은 이 소설을 금서로 지정한 중국 정부를, 룽중융의 선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작가 팡팡을 연상케 한다. 세상은 누구를 승자로 기억할까.
칭린은 알기 싫은 일을 알려 하지 않는 것도 강함의 또다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긴 시간이 진실의 모든 것을 연매장했다. 설령 안다고 해도, 그게 진실의 모든 것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437쪽)
"누군가는 망각을 선택하고 누군가는 기록을 선택해. 우리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살아가면 되는 거야." (44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