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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24년 1월
평점 :

어린 아이에게 부모는 온 세상과 같다. 부모가 하는 말은 그들에게 곧 법이며 때로는 법을 능가한다. 그런 부모가 편파적이거나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가령 세상에 과일은 오렌지뿐이고, 다른 과일을 보더라도 오렌지만 먹으라고 강요한다면. 영국 작가 지넷 윈터슨의 소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에는 정말로 그런 어머니가 나온다. 지넷의 어머니는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다. 그의 일과는 종교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남편과 아이도 종교에 우선하지 않는다. 지넷은 그런 어머니를 하늘처럼 여긴다.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하고 교회에도 꼬박꼬박 나가고 장래에는 선교사가 될 생각이다.
그러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지넷은 우연히 멜라니라는 소녀를 만난다. 그 전까지 지넷은 어머니와 너무 가깝게 붙어 지내서 다른 친구들을 사귈 여력이 없었다. 학교에 다닌 적도 있지만 지넷이 너무 신실해서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기 어려웠다. 멜라니는 지넷만큼 신실한 신자이기 때문에 지넷의 믿음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주는 친구를 만난 것이 기뻐서, 지넷은 낮에도 밤에도 멜라니를 만난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지넷의 어머니와 교회 사람들은 좋게 보지 않는다. 급기야 두 사람이 성경에서 허용하지 않는 욕망을 품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이 부상한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는 페미니즘 문학과 고전 퀴어 문학의 필독서로 꼽힌다는 점,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이라는 점 등에서 리타 메이 브라운의 소설 <루비프루트 정글>과 결이 비슷하다. 하지만 내용은 크게 비슷하지 않은데, 내 생각에 <루비프루트 정글>의 주인공이 일찍 자신의 성 정체성을 깨닫고 벽장에서 나온 것과 달리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의 주인공은 종교의 영향으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비교적 늦게 깨닫고 벽장에서 나오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인 것 같다.
오히려 이 소설은 보수적인 기독교 문화의 부작용과 모녀 간의 애증 관계를 그리는 데 더욱 집중하고 있다. 어머니와 교회 사람들에게 사탄으로 몰려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지넷이 나중에 다시 엄마 곁으로 돌아가는 결말이나, 교회의 오랜 비리를 알게 된 후에도 신앙심을 버리지 못하고 혼자서 신앙 생활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 등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소설 곳곳에 성경과 아서 왕 전설이 인용되어 있는데, 성경도 그렇지만 아서 왕 전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고전 독서의 부족함을 새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