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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평점 :

어릴 때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쉬웠다. 나와 내가 좋아하는 사람 또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선이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 또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악.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구분하고 재단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지금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쉽지 않다. 일단 나 자신부터가 선이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선이라는 확신은 더더욱 안 든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악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 사람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나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모습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타인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이는 김금희 작가의 소설들이 일관되게 담고 있는 생각과도 비슷하다. 김금희 작가의 첫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의 두 주인공 경애와 상수는 왕따 사원과 낙하산 팀장대리로 만나 회사 생활을 하다가 고등학생 시절 경애가 운 좋게 살아남은 화재 사건에서 상수의 친한 친구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직전에 발표한 장편소설 <복자에게>에서는 법정에서 욕을 해서 징계성 좌천을 당한 이영초롱이 어릴 때 잠깐 살았던 제주로 돌아가 옛 친구 복자와 재회하는 과정을 그린다. 이영초롱은 자식들을 책임지지 못할 만큼 무능력한 부모와 불의의 편을 드는 사법부를 비난했지만,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외롭고 힘들었던 시절에 자신을 환대해 주었던 친구 복자 앞에선 자신 또한 무정하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임을 깨닫는다.
김금희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대온실 수리 보고서>도 다르지 않다. 주인공인 30대 여성 영두는 창경궁 대온실 보수공사의 백서를 기록하는 계약직 직원으로 일을 시작한다. 이 일을 맡는다는 건 영두에게 개인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는데, 강화에서 태어나 지금도 강화에서 사는 영두가 중학교 때 잠깐 창경궁이 위치한 종로구 원서동 낙원하숙에 살았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영두는 오랫동안 그 시절을 자신의 흑역사로 여기고 기억에서 지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창경궁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작성하는 작업을 하면서 과거를 정확히 기록하기 위해서는 기억보다 훨씬 정확한 재료가 요구되며 이를 위해서는 과거와 관련된 인물 또는 장소, 물건 등을 다시 대면할 필요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과거의 기억, 과거의 인물, 과거의 장소와 다시 대면하는 과정에서 영두는 과거의 자신이 자기만의 서사에 갇혀서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거나 그들의 입장을 배려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물론 그 시절의 영두는 아직 어렸고, 모르는 게 많았고, 가진 게 별로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관심과 호의를 무례나 무시로 받아칠 필요는 없었다. 당시 낙원하숙의 주인이었던 문자 할머니는 생판 남인 영두를 친손녀처럼 예뻐해주고 돌봐줬다. 그 때는 그게 별 일 아니라고, 오히려 부담스럽고 굴욕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절 문자 할머니의 마음은 지금의 영두가 친구 은혜의 딸 산아를 조건 없이 사랑해 주는 마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 마음을 이제 와서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갚을 길이 없는 그 마음에 대해, 영두는 글쓰기로 보답하고자 한다. 예산과 일정 상의 이유로 많은 사람이 반대하는 청경궁 지하 발굴 공사를 강행하는 한편으로, 이제는 빈 집이 된 낙원하숙을 드나들고 그 시절 함께 하숙을 했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모르는 (대온실과 문자 할머니의) 역사의 공백을 알아내려고 노력한다. 국가주의, 민족주의의 관점으로 보면 일제의 잔재인 대온실과 잔류 일본인의 역사는 청산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는 소설 속에서 영두가 공사를 강행하지 않고 문자 할머니의 과거를 들추지 않도록 말리는 사람들의 입장과 일치한다. 하지만 영두가 보기에 실체를 바로 보지 않겠다는 건, 바닥이 튼튼한지 아닌지 확인도 안 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리는 것과 같다. 그 건물은 금방 무너지거나, 무너지지 않아도 불안하다.
무너지지 않아도 불안하다, 라고 쓰면서 나는 어쩐지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이 떠올랐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친일(또는 반민족 행위자. 둘 다 마음에 드는 단어는 아니지만 대체할 말을 몰라서 그냥 쓴다)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나라 꼴이 이렇게 되었다고 한탄한다. 건국 초기에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내용은 한국 근현대사 시간에 필수적으로 배우는 내용인데, 당시 그 내용을 배울 때는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제 와서 이렇게 큰 후폭풍으로 밀어닥칠지 몰랐다. 지금으로서는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한민국 사회 내부에 있는 친일, 반민족 세력을 청산하는 것이 더 시급하게 느껴진다. 창경궁 대온실 바닥을 들어내듯. 빈집에서 나온 쓰레기 봉투를 열어 헤치듯.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이 글의 도입부에 쓴 "(각자의 사정이 있으므로) 타인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결론"과 배치된다. 이 사람은 이래서 봐주고, 저 사람은 저래서 봐주고, 그러다가 나라가 이 꼴이 된 건지도. 근데 왜 항상 어떤 사람들만 봐주고, 어떤 사람들은 안 봐주는 걸까. 탄핵을 당한 전 대통령이 아직도 관저에 있는 게 말이 되나. 탄핵 당한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대선 후보를 내는 게 말이 되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그 죄를 지은 사람을 미워하지 않기란 결코 쉽지 않은 것 같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시간이 흘러도. 죄만 밉고 사람은 밉지 않다면, 그만한 죄가 아니거나 미움 이상의 사랑을 품었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