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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양들의 축연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최고은 옮김 / 엘릭시르 / 2024년 3월
평점 :

2008년(한국어판은 2010년)에 출간된 책의 개정판인데 지금 읽어도 매우 재미있다. 책에 실린 단편은 모두 다섯 편으로 각기 다른 이야기로 읽히지만 다 읽고 나면 '바벨의 모임'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바벨의 모임은 상류계급의 영애들만 가입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독서 모임으로, 각각의 단편에는 바벨의 모임 소속이거나 모임의 존재를 아는 인물이 한 명 이상 나온다. 독서모임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에드거 앨런 포, 체스터턴, 요코미조 세이시 등 다양한 (미스터리) 문학 작품이 언급된다는 점에서 비블리오 미스터리 소설로 보아도 좋겠다.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이 고르게 좋은데,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표제작 <덧없는 양들의 축연>이다. 얼마 전까지 바벨의 모임 회원이었던 오데라 마리에의 아버지는 유산을 물려 받아 부자가 된 케이스로, 돈은 많지만 부자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래서 그는 부자들만이 고용할 수 있는 세상에 몇 없는 특별한 요리사인 '추냥(廚娘)'을 중개업자의 소개로 고용하는데, 이 추냥의 행실이 여간 특이한 것이 아니다. 최고의 요리사답게 요리 실력은 우수하지만, 한 끼 식사를 차리는 데에만 엄청난 양의 식재료를 소비하고 (당연히) 엄청난 액수를 청구한다. 대체 그의 비밀은 무엇일까.
<다마노 이스즈의 명예>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를 연상케 하는 백합(GL) 느낌이 가미된 고딕 미스터리 소설로, 이 작품 또한 상당히 매력적이다. 고다이지라는 지방 도시에서 이름난 가문의 외동딸인 스미카는 엄한 외할머니와 유순한 어머니의 비호 아래 부족함 없이 자랐다. 스미카가 열다섯 살이 되던 생일에 외할머니는 스미카와 동갑인 여자아이 다마노 이스즈를 선물로 주었고, 스미카와 이스즈는 외할머니 앞에선 아가씨와 시녀를 연기하지만 단둘이 있을 때에는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이후 대학에 진학한 스미카는 그토록 동경한 바벨의 모임에 가입하지만,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생사의 기로에 선다.
앞에 서술했듯이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은 바벨의 모임이 등장한다는 것 외에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타인(또는 타자)의 '목숨'을 희생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등장한다는 또 다른 공통점이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산장비문>의 화자인 야시마 모리코다. 야시마는 깊은 산속에 있는 무역상 가문의 별장을 관리하는 별장지기 일을 맡는데, 일 년이 지나도 별장을 찾아오는 손님이 없자 어떤 일을 벌인다. 이런 식으로 남이야 죽든 말든 내가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야말로 악(惡)의 시작점이자 핵심인 것 같고, 이를 잘 보여주는 단편들을 읽으니 기분이 오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