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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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봤을 때는 내 취향이 전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 나는 술을 마시지 않고, 주정을 부릴 정도로 술을 마신 사람과는 웬만해선 상종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녕 주정뱅이>라니. 주정뱅이 앞에 안녕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읽기 시작한 이 소설집. 거짓말 안 보태고 이제까지 네다섯 번은 족히 읽은 것 같다. 읽을 때마다 새로워서 처음 읽는 기분이 드는데 읽어 보면 당연히 다 아는 내용이다. 그런데 무슨 내용이냐고 누군가 물으면 시원하게 답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봄밤>은 무슨 내용이야? 음, 그러니까 알코올 중독인 여자와 류머티즘 환자인 남자가 마흔 넘어 사랑에 빠지는데...


최근에 다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는 맨 마지막에 실린 <층>이 유난히 좋았다. 주로 몸을 쓰는 일을 해온 남자와 박사 수료생인 여자가 연애를 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무척 좋아했지만 각자 다른 상황에서 상대의 말을 오해하는 바람에 헤어지게 된다. 이들은 자신이 오해했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그 오해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자격지심 때문에 빚어졌다는 사실을 (아마도) 영원히 모른 채 살 것이다. 독자라는 먼 입장에서 보면 지독한 농담 같은 상황인데, 영문을 알 길이 없는 두 사람에게는 곱씹기도 찝찝한 추억일 것이다. 이런 상황이 비단 소설 속에만 있을까.


지독한 농담 같은 불행이라는 모티프는 <카메라>라는 단편에도 등장한다. 문정은 직장 동료 관희의 남동생 관주와 몰래 사귀다 헤어졌다. 이별 이후 한 번도 연락이 없었으므로 그의 현재를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관주에게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알게 되고 그 사건이 자신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당시 애인이었던 문정이 관주의 불행을 의도했을 리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게 사실이고, 그 사실을 알아버린 문주로서는 죄책감을 피할 길이 없다. 차라리 모르고 살았다면 나았을까. 아니면 늦게라도 그의 사랑을 알아서 다행인 걸까. 완전한 불행도 다행도 없는 것이 인생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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