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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기름
단요 지음 / 래빗홀 / 2024년 11월
평점 :
서른네 살 무직인 우혁은 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김 형의 권유로 그가 운영하는 강남의 한 입시 학원의 보조 강사로 취직한다. 한 달 정도 밤낮 없이 일하자 그의 수중에는 상당한 금액의 돈이 생겼고, 크고 작은 빚을 갚고 난 후에도 얼마간의 돈이 남자 그는 그동안 돈이 없어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던 도박 생각이 간절해진다. 우혁의 변화를 알아챈 김 형은 아직도 그 나쁜 버릇을 못 고쳤느냐며 우혁을 타박하지만, 사실 우혁에게는 도박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그만의 사연이 있다. 중학생 시절 백운산 계곡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그를 어떤 소년이 살려준 이후로 그의 인생에는 그만한 자극과 흥분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소년과 약속한 데다가 자기가 생각해도 현실인지 꿈인지 아리송한 기억이라서, 우혁은 그 후로 오랫동안 그 때의 일을 비밀로 간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 갔다가 우연히 보게 된 탐사보도 프로그램에서 새천년파라 불리는 사이비 종교 이야기를 접하게 되고, 공교롭게도 그 날 밤 야근을 하러 학원에 갔다가 오래 전 자신을 살려준 그 소년을 만나게 된다. 이름이 이도유라고 밝힌 소년에 따르면 그가 예언한 종말을 믿고 서른두 명의 숭배자가 죽음을 택했고 그 중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한다는데...
단요 작가의 신작 장편 소설 <피와 기름>은 판타지 요소가 가미된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처럼 보이지만 철학, 신학, 윤리학, 정치학 등의 인문학적 논의를 문학적 서사로 풀어낸 작품이기도 하다. 단요 작가의 작품으로는 데뷔작 <다이브> 밖에 읽지 못한 나로서는 <다이브>와 비교할 때 작품의 결이나 깊이가 많이 달라져서 신선함을 넘어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우혁은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무직에, 부모 집에 얹혀 살고, 돈만 생기면 도박부터 생각하는 철없는 인간으로 그려지지만, 사실 그는 어릴 때 당한 사고를 계기로 신을 영접했고 그로 인해 평범한 삶에는 관심이 없어졌다(고 주장한다). 우혁의 아버지와 사회적으로 그의 아버지 역할을 자처하는 김 형은 우혁을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로 간주하지만, 생사를 관장하는 신을 만난 적 있는 우혁으로서는 생의 유한함을 모르고 헛된 물질이나 명예를 탐하는 그들이야말로 어리석어 보인다. 그랬기 때문에 이도유가 다시 한 번 그의 눈 앞에 나타났을 때 두 번 고민하지 않고 그를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우혁이 신이라고 확신하는 이도유의 정체를 다른 사람들은 사이비라고 의심한다는 것이다. 우혁조차 오랜만에 만난 소년의 발에 평범한 나이키 운동화가 신겨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이 체험한 기적이 진짜가 맞는지 의문을 품는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신조차 믿을 수 없고, 교주를 맹신해 목숨까지 버리려고 했던 신도들도 등을 돌리는데, 어떻게 사람들은 국가나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을 신뢰할까. 그러한 신뢰는 사교육이나 도박 등에 대한 믿음과 얼마나 비슷하거나 다를까. 결말로 끝인 소설이 아니라 결말 이후에 더 많은 문제를 제기하는 소설이라서 여러 번 다시 읽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