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백의 그림자>는 한 편의 단편 영화 같은 소설이다. 소설은 숲에서 시작한다. 그림자를 따라 걷는 여자가 있고, 그 여자의 뒤를 따라 걷는 남자가 있다. 여자의 이름은 은교, 남자의 이름은 무재다. 두 사람은 도심에 있는 전자상가에서 일하다 만났다. 은교는 여씨 아저씨의 수리실에서 접수와 심부름을 도맡고 있고, 무재는 트랜스를 만드는 공방에서 견습공으로 일한다. 두 사람이 일하는 전자상가는 오래 되었고 인적도 점점 뜸해지고 있지만, 이들에게는 둘도 없는 일터이자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소중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 전자상가를 철거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이들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운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가 2013년,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이다. 그 때 쓴 리뷰를 찾아 보니 '평범한 여자와 남자가 만나 평범한 공간에서 평범한 사랑을 하는 이야기'라고 썼다. 다시 읽어 봐도 '평범한 여자와 남자가 만나 평범한 공간에서 평범한 사랑을 하는 이야기'가 맞는데, 11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며 눈에 들어온 것은 오직 사랑만은 아니다. 소설 초반에 은교가 따라갔던 그림자는 다른 사람들 눈에도 보인다. 그림자는 커지기도 하고 일어서기도 하는데, 무심코 따라갔다가는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


그림자는 은교와 무재의 인생에, 일상에 수시로 나타난다. 무재는 아버지가 거액의 빚을 졌을 때 그림자를 보았고, 은교는 여씨 아저씨의 친구가 미국으로 유학 보낸 딸에게 무시를 당했을 때 그림자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는다.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남자가 크레인에서 떨어져 죽었을 때, 당국의 강압적인 철거 명령에 의해 하루 아침에 일터를 잃은 사람들의 주변에도 그림자가 나타난다. 은교와 무재는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도록 서로 붙잡아주고, 갈비탕이나 치킨, 국수 같은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일상을 버틸 뿐이다. 상징적이지만, 이보다 더 현실적인 이야기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