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시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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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대 뉴욕. 자기 자신을 진보적인 남성이라고 여기는 부유한 변호사 뉴랜드 아처는 뉴욕의 유력 가문 사람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메이 웰랜드와의 약혼을 발표한다. 환희와 흥분이 가득한 그 자리에 찬물을 뿌린 이가 있었으니, 그는 유럽의 명문가로 시집을 갔지만 남편과의 불화로 이혼했다는 소문이 파다한 메이의 사촌 엘렌 올렌스카 백작 부인이다. 당시 뉴욕의 사교계 사람들은 이혼을 신 앞에서 한 서약을 깨트리는 불경한 일로 간주했고, 이혼한 여성이 얼굴을 들고 사람들 앞을 활보한다는 건 같은 집안 사람들도 용납하기 어려운 뻔뻔한 일로 여겼다.


엘렌 올렌스카의 집안 사람들은 엘렌이 이혼을 하지 않도록 설득할 인물로 곧 있으면 그들 집안의 사람이 되는 아처를 택한다. 아처로서는 달갑지 않은 임무였지만, 사랑스러운 신부의 집안 사람들이 부탁한 일인 데다가 그 자신이 진보적인 남성을 자처하고 있기도 해서 직접 엘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엘렌과 여러 번 만나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아처는 엘렌의 거침없는 생각과 자신있는 태도에 점점 더 이끌린다. 급기야 이 감정이 사랑으로 발전하는데, 아처 자신이 엘렌의 이혼을 막는 임무를 맡고 있는 데다가 메이와의 결혼 날짜가 다가와서 아처는 사면초가 상태에 빠진다.


이디스 워튼의 소설 <순수의 시대>를 읽기로 마음 먹은 건, 김하나 작가의 책 <금빛 종소리> 덕분이다. 전부터 읽어보고 싶기는 했지만 이성애 로맨스 소설 같아서 손이 가지 않았는데, <금빛 종소리>에 소개된 책 중에는 진입 장벽이 가장 낮아 보여서 읽게 되었다. 막상 읽어 보니 이성애 로맨스 소설이 맞기는 한데 이성애 로맨스 소설만은 아니라서 좋았다. 소위 '깨인' 남자라고 자부하는 아처조차도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 - 어린 여자는 무지하고 순수할 것이다, 남자 경험이 있는 여자는 간교하고 해로운 존재다 - 에 사로잡혀 현실에 대한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행복마저 망치는 모습을 보면서, 1920년에 이런 소설을 발표한 작가가 참 현명하고 용감하다고 느꼈다.


미국 뉴욕 사교계를 무대로 개인의 자유와 행복보다 집단의 관습이나 체면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 무지함을 보여준 점도 인상적이었다. 엘렌이 이혼을 결심했던 이유는 남편의 비이성적인 행동 때문인데, 이혼 사유가 남편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렌의 '부덕함'을 비난하며 이혼 포기를 종용하는 것이 다름 아닌 엘렌 자신의 집안 사람들이라는 점이 정말 이상해 보였다(하지만 지금도 왕왕 있는 일이기도 하다). 우스운 건, 아처 세대에선 불경하게 여겨졌던 일들이 아처의 아들 세대에선 전혀 불경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은 결국 바뀌고, 바뀌지 못한 사람들만 불행해진다는 걸 알게 하는 결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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