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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국 인문 기행 ㅣ 나의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24년 1월
평점 :
얼마 전 일본의 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가 일본 고교 야구의 꿈의 무대로 불리는 '고시엔'에서 우승했다. 뉴스를 보면서 한국인으로서 가슴이 벅찬 한편으로 지난해 12월 18일 타계한 故 서경식 선생님 생각이 많이 났다. 서경식 선생님은 1951년 일본 교토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난 분으로, 1970년대 '재일조선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알려진 조작 사건으로 구속된 두 형(서승, 서준식)의 석방과 한국 민주화 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그런 서경식 선생님이 고시엔 구장에 '동해 바다'로 시작되는 교가가 울려 퍼지고 자신들의 뿌리가 조선 또는 한국임을 자랑스러워 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런 마음을 품고 읽은 이 책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은 서경식 선생님의 유작이다. 이 책은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나의 영국 인문 기행>에 이은 '나의 인문 기행' 시리즈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책이다. 앞의 두 권도 밝은 분위기는 아니지만 이번 책은 유난히 더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에게 미국은 결코 좋은 추억으로 남은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1985년 저자가 처음으로 미국에 방문했을 때 저자의 목적은 누명을 쓰고 한국의 교도소에 수감 중인 두 형의 구명 운동을 도와줄 인권 단체를 찾는 것이었다. 언어도 안 통하는 나라에서 갖은 고생을 했지만 원했던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2016년 미국에 갔을 때는 트럼프가 집권 직전이었고, 2020년 마지막 미국 방문 때는 팬데믹 직전이었다. 불안한 현실과 비관적인 미래 때문에 우울한 마음이 들 때마다 저자는 미술관을 찾았다. 저자는 원래 미국 회화는 유럽 회화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미국에 유명한 미술관이 많지만, 유럽의 유명한 미술 작품들을 많이 가져다 놔서 유명해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보니 미국 회화는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내셔널 갤러리에서 만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수틴의 초상>, 디트로이트 미술관에서 본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디트로이트 산업> 등 인상적인 작품이 많았다.
저자는 미국 방문의 추억이 그저 비참하고 우울하기만 했던 건 아니라고 회고한다. 80년대에 처음 미국에 갔을 때 영어를 못하는 자신을 도와준 자원봉사자들이 없었다면 힘들었던 시간이 두세 배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저자를 디트로이트에 초대한 일본인 친구 U군과의 에피소드도 뭉클하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디아스포라 지식인인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문학평론가 에드워드 사이드와의 인연도 흥미롭다. 두 사람의 만남과 대화가 성사되었다면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는 인류에게 귀하고 큰 선물이 되었을 텐데. 많이 늦었지만, 두 분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