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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과 나 - 배명훈 연작소설집
배명훈 지음 / 래빗홀 / 2023년 11월
평점 :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1651년 출간한 저서 <리바이어던>을 통해 자연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군주가 통치하는 국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학창 시절 사회 수업 시간에 이러한 내용을 배운 것을 기억하지만, 사람들을 규율하는 법이나 질서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말 그대로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경험한 적은 없다. 현재의 아메리카나 오세아니아 등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여 그 지역에 새로운 사회 체계를 만들었다고 믿었던 사람들도, 실제로는 그 지역에 본디부터 거주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지우고 자신들이 속해있던 지역의 사회 체계를 가져와 이식한 것에 불과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무법 상태를 극복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다면 화성의 경우에는 어떨까. 2023년에 출간된 배명훈 작가의 연작소설집 <화성과 나>는 화성에 인류의 이주가 본격화될 경우 어떤 세계가 들어설 것인지 상상한 내용을 담고 있다. 화성은 현재까지 생명체가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람들을 규율하는 법이나 질서가 부재하는 리바이어던 상태에 부합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이과 출신의 우주비행사나 과학자가 아니라 문과 출신의 정치가 또는 관료로서 화성에 파견될 경우 어떤 세계를 건설할 것인가. 출신 국가는 물론이고 사용하는 언어, 따르는 종교, 관습, 문화 등이 각기 다른 사람들을 '화성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결속시키기 위해 당장 필요한 입법, 행정, 사법 제도는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에 가장 먼저 답하는 소설이 첫 번째로 실린 단편 <붉은 행성의 방식>이다. 인류의 화성 이주가 시작된 지 지구 시간으로 6년 반이 지난 시점에 화성 최초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행성관리위원회 소속의 지요와 희나는 신고를 받자마자 현장으로 달려가지만, 화성에서의 첫 살인 사건이다 보니 수사에 필요한 기본적인 절차나 규칙이 아무것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고 당황한다. 행성관리위원회는 공식적인 정부도 아니며 강제력도 없다. 범인이 잡힐 경우 그를 처벌할 형법도 없다. 조종사들이나 과학자들은 상식에 따라 처리하면 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2,400명의 주민 중에 누구의 상식을 따를 것이며 또 그걸 어떻게 정한단 말인가.
두 번째 단편 <김조안과 함께하려면>에서는 화성의 행정관료가 되기 위한 방법을 상상한다. 다재다능한 김조안을 흠모한 나머지 그의 화성행도 함께 하려고 준비 중인 '나'는 (아직) 아무도 살지 않는 행성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학문은 법학이나 행정학이 아닌 기상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어지는 단편 <위대한 밥도둑>에서는 인류의 화성 이주가 본격화될 경우 식량 자원의 도입 순서를 어떻게 정할지 상상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간장게장을 먹고 싶은 화성의 한국인들과 성게초밥을 먹고 싶은 화성의 일본인들이 서로 자신들의 음식을 먼저 들여오겠다고 싸울 경우 누가 중재하고 어떻게 타협안을 내놓을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네 번째 단편 <행성봉쇄령>에서는 지구-화성 간 사이클러 운항 중에 근지구궤도동맹으로부터 불합리한 명령을 받는 경우를 그린다.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국가 및 동맹에 의해 국제 사회의 안정과 평화가 위협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대책이 없는 상황을 보면서, 지금도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과 비슷한 상황이 우주적인 스케일로 일어날 경우에 대한 대책 또한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단편 <행성 탈출 속도>에서는 화성으로 이주한 부모를 둔 '나'가 자신의 모든 개인 정보가 데이터로 수집되는 것에 대한 반감과 고학력자가 수두룩한 환경에 대해 압박감을 느끼고 지구로 '탈출'하기를 선택하는 과정을 그린다.
마지막 단편 <나의 사랑 레드벨트>의 '레드벨트'는 도시의 무질서한 확산을 방지하고 자연환경을 보전하기 위해 지정하는 개발 제한 구역인 '그린벨트'의 화성 버전이다. 행성의 인간 대리자인 정반음은 우주선 동기이자 존경받는 도시 건설 전문가인 문결에게 레드벨트를 해제해 달라는 청탁을 받은 이후로 주간 불면증에 시달린다. 레드벨트의 수호자를 자처하지만 동기 사랑이 지극한 반음으로서는 문결의 부탁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반음이 살고 있는 화성은 사람들을 규율하기 위한 제도나 법 등이 이미 마련된 듯 보이지만, 인간 자신의 한계 때문에 (불면증에 걸릴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겪는 걸 보면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극복하기 어려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