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
다카세 준코 지음, 허하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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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십 년 차인 서른여섯 살 여성 이쓰미는 며칠 전부터 남편 겐시가 목욕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목욕뿐 아니라 세수도 안 하고 양치도 면도도 안 한다. "얼굴 정도는 제대로 씻는 게 어때?"라고 물어도 남편은 고개만 갸웃할 뿐이다. 이대로 안 씻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직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지장이 생길 것이다. 아니 당장 이쓰미 자신이 남편의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집 안에서 숨쉬기가 힘들다. 성관계는 물론이고 가벼운 신체 접촉도 엄두가 안 난다. 이대로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계속될 수 있을까. 이쓰미는 씻지 않는 남편을 씻게 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는데...


2022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기를>의 작가 다카세 준코의 소설 <샤워>는 씻지 않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사수하기 위해 분투하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현대 사회의 어두운 면들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쓰미의 남편 겐시가 씻기를 거부하게 된 계기는 직장 내 괴롭힘과 따돌림이다. 회식 자리에서 입사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후배에게 물세례를 맞은 이후로 남편은 수돗물과의 접촉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수돗물로 샤워는 물론 세안과 양치도 안 하고, 수돗물을 마시는 것도 안 한다. 이쓰미는 궁여지책으로 수돗물 대신 생수 사용을 권하지만 경제적 부담이 커서 지속하기 어렵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씻지 않는 남편 때문에 이쓰미의 고민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별거나 이혼을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쓰미 자신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보는 건 아니지만, 그러기에는 이쓰미가 남편을 아직 많이 사랑한다. 씻지 않아 냄새가 나도 여전히 남편의 몸을 만지고 싶고 남편이 자신의 몸을 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그렇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 남편의 체취에 익숙해질 즈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씻지 않는 남편 때문에 내가 괴로운 건 어떻게 할 수 있어도 남들이 괴로운 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때부터 이쓰미는 남편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남편을 지키는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지금 이 상황을 아무 상관 없는 누군가가 판단해줬으면 했다. 비 오는 밤에 꼼짝하지 않고 서 있어도 그 누구도 말을 걸어주지 않는 이 도시에서는, 큰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55쪽)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씻지 않는 남편으로 인해 생긴 부부 간의 문제를 다루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 간의 거리 문제가 다각도로 그려져 있다. 지방 출신인 이쓰미는 가족은 물론 친척 간의 거리가 지나칠 정도로 가깝고, 회사 동료나 이웃들과 만나면 안부 인사를 나누는 정도는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다. 반면 도쿄 출신인 남편은 친척은 물론 가족과도 개인 대 개인으로서 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웃은 같은 동네,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 정도로 인식한다. 회사 동료들에게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해도 곧바로 항의하지 않고, 악취를 풍기는 정도로 일종의 수동 공격을 할 뿐이다.


지방 출신이지만 도쿄에서 산 지 십여 년이 지난 이쓰미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걸 경계하는 도쿄 사람들의 태도를 산뜻하게 느끼면서도, 타인으로 인해 자신이 피해를 입는 상황에 처하는 것 역시 경계하는 도쿄 사람들의 태도를 불편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정신적으로는 물론이고 육체적으로도 위기 상황인 남편을 누구라도 도와주기를 바라고, 남편 자신도 이쓰미에게 한 번이라도 좋으니 도와달라는 말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도 선뜻 도와달라고 말하지 못하는 남편의 마음도 사랑, 도와달라는 말을 못 들었어도 기꺼이 도와주는 아내의 마음도 사랑이지 않을까. 대놓고 써있지는 않아도 부부 모두 사랑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겨도 계속 사랑하겠다는 자세가 엿보였기 때문에 결말이 더욱 더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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