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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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 사는 톈홍은 음력 7월 15일 '중원절'을 맞아 오랜만에 자신의 고향인 타이완 중부의 외딴 시골 마을 용징에 돌아온다. 지금은 쇠락해 별 볼 일 없는 동네이지만 1980년대만 해도 이 지역에 개발 붐이 불어서 이주해 오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톈홍의 아버지 천톈산도 그 중 한 명이었다. 딸 다섯 아들 둘을 둔 그는 평생 열심히 일해서 가족들을 건사했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타운하우스가 억울하게 죽은 귀신들의 원혼이 떠도는 숲을 밀어버리고 그 위에 지어진 건물인 탓인지, 톈홍의 형제 자매들은 단 한 사람도 순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첫째 딸 수메이는 돈만 생기면 노름이나 사업으로 날리는 남편 때문에 하루도 편한 날이 없다. 둘째 딸 수리는 타이베이 시 공무원인데 매일 같이 진상 민원인들에게 시달린다. 셋째 딸 수칭은 타이완 최고 대학을 나온 엘리트이지만 유명 뉴스 앵커인 남편에게 학대를 당한다. 넷째 딸 쑤제는 여동생을 밀어내고 마을 최고 부자인 왕씨 집안 큰아들과 결혼했지만 거대한 저택의 작고 어두운 방 안에 갇혀 지낸다.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다섯째 딸 만메이와 장남이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무한한 애정과 지원을 받은 첫째 아들 텐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타이완 작가 천쓰홍의 장편 소설 <귀신들의 땅>은 천씨 집안 사람들의 일대기를 통해 타이완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준다. 이 소설은 가족들이 원래 살던 구식 가옥을 떠나 최신식 타운하우스로 이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가족들은 새로 지은 건물인 데다가 모든 것이 현대식인 타운하우스로 이사 와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점차 이상한 소문들이 그들의 귀에 들어온다. 타운하우스 근처에 있는 대나무 숲에는 일본군에게 강간 당해 죽은 여자 귀신이 있다든가, 개천에는 짐승의 시체가 썩어서 내려 온다든가... 불안한 예감은 이들의 삶을 잠식한다. 어릴 때는 다들 예쁘고 잘났던 형제 자매들이 하나 같이 비참한 생활을 하거나 제 명을 못 채우고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이것들이 과연 귀신의 탓일까. 마을을 떠도는 귀신 이야기 대부분이 억울하게 죽은 여자들의 사연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이 귀신이나 저주, 운명의 탓으로 돌리는 것들은 대체로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주의 사상으로 인해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혐오, 위협과 폭력에 기인한다. 여성만도 아니다. 아들이지만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아들 취급을 못 받고 집에서 쫓겨난 톈홍처럼, 살아 있는 인간이지만 귀신처럼 숨어 있기를 강요 받는 사람들이 있다. 진정한 자기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눈에는 행복한 인간들의 세상이야말로 무시무시한 귀신들의 땅으로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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