쿄코와 쿄지
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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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출신의 백인 남자 데이비드 셰이퍼의 아버지는 언어학자였다. 아내가 죽은 후 남은 아들을 돌보는 대신 사라져가는 소수 민족의 언어를 연구하는 일로 평생을 보낸 아버지를 데이비드는 오랫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도 언어학자가 되었고 한국의 대학에 취직했지만, 어떤 착오로 인해 어학원 강사로 채용되어 학생인 옥희를 만나게 된다. 때는 1980년대 초.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동생을 잃은 옥희는 말수는 적어도 공부는 열심히 한다. 그 모습에 반한 데이비드는 옥희와 결혼하지만, 영어를 잘 못하는 옥희와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데이비드 사이에 대화가 오가는 일은 거의 없다.


한정현의 두 번째 소설집 <쿄코와 쿄지>에는 작가의 등단작인 <아돌프와 알베르트의 언어>를 비롯해 총 열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아돌프와 알베르트의 언어>의 주인공 데이비드는 한국인 여성 옥희와 결혼 생활을 하면서 그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두 사람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탓도 있지만, 국가 폭력에 의해 가족을 잃은 사람의 말문을 열고 공감하는 것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데이비드는 끝내 옥희와 원활하게 대화하는 경험을 해보지는 못하지만, 옥희를 통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게 된다.


아버지가 연구했던 소수 언어나 국가 폭력 피해자인 옥희의 침묵은 둘 다 피해자의 언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약자, 소수자, 피해자의 언어는 물리적, 정신적으로 억압된 상태이기 때문에 사실상 침묵에 가깝다. 그러므로 언어학자의 일은 사회 안에 넘쳐나는 언어를 분석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회 밖으로 밀려나 있거나 사회 안에 있지만 침묵할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의 언어를 발견하고 수집하는 것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이는 작가 후기의 "소설 쓰기와 공부를 지속할수록 '음성언어화되지 못한' '침묵'의 언어가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침묵을 향한 내 태도에 대한 생각을 쓰고자 한 소설집이기도 하다."라는 문장과도 연결된다. 


실제로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은 '음성언어화되지 못한' 사건들, 불가피하게 '침묵'을 선택해야 했던 존재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표제작 <쿄코와 쿄지>는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란 네 친구가 각자의 이유로 1980년 광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낸 경녀, 혜숙, 영성, 미선은 서로의 영원한 우정을 맹세하는 의미에서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아들 자(子)'가 아닌 '스스로 자(自)'로 바꾼다. 그렇게 경자, 혜자, 영자, 미자가 된 이들은 각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거나 다른 진로를 정하는 과정에서 침묵하는 존재가 된다.


이어지는 단편 <리틀시즌>은 경자의 딸 영소가 엄마의 세 친구 중 유일한 생존자인 미자 이모와 교류하며 지내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 다음 단편 <지금부터는 우리의 입장>은 미자 이모가 입원 중인 요양 병원의 병실 메이트 박두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박두자는 자신을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코타르 증후군에 걸렸는데, 알고 보니 그는 삼풍백화점 사고 생존자인데, 사고로 당시 동료 이상의 감정을 느끼던 언니를 잃고 인생의 경로가 크게 바뀌었다. 


이 책은 이런 식으로 하나의 이야기가 그 다음 이야기로, 또 그 다음 이야기로 계속해서 연결되고 확장되는 구조를 취하며 다양한 범주와 층위의 피해자, 약자, 소수자를 불러낸다. 사고 피해자이지만 성소수자라서 자신이 입은 손해는 물론 자신의 존재조차 가시화하기 힘든 경우가 있는가 하면, 사고로 가족을 잃은 유족인데 자신의 피해를 부정하고 심지어 가해자 편을 드는 경우가 있는 등 같은 피해자 중에도 다양한 유형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도 이 책의 미덕이다. 문제 의식도 좋고 소재도 좋지만 이를 담아낸 형식과 문장까지 매우 좋다. 올해 만난 책 중에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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