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같은 맛
그레이스 M. 조 지음, 주해연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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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미국인의 책을 그동안 여러 권 읽었다.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가 그랬고, 소설이기는 하지만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와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도 한국계 미국인을 비롯해 한인 이민자들의 삶을 약간이나마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최근에 읽은 그레이스 M. 조의 <전쟁 같은 맛>은 이제까지 존재한 한국계 미국인 서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책이다. 


저자는 백인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저자의 어머니 '군자'는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 이후 귀국했으나 한국전쟁 중에 가족의 대부분을 잃고 부산의 기지촌에서 일하며 남은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이후 상선 선원으로 한국을 방문한 백인 미국인 남자와 결혼해 그를 따라 아이 둘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했다. 그 중 둘째 아이가 이 책을 쓴 그레이스 M. 조다. 


한국계 미국인인 저자는 어머니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을 했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알지 못했다. 어머니가 기지촌에서 일했고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났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기지촌이 어떤 공간이고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70년대 한국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외국 남자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이를 낳아 키우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역시 몰랐다.


저자가 15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에게 조현병이 나타났다. 낯선 외국땅에서 열심히 일하고 가족과 이웃들을 위해 음식 만들기를 즐겼던 어머니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몇 년 후 저자는 오빠의 아내로부터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들었다. 어머니가 기지촌에서 했던 일의 '진짜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그 때까지 조현병의 원인이 유전이나 가난, 이민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아닐까 생각했던 저자는 어머니가 기지촌에서 경험한 신체적, 성적 트라우마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 때부터 저자는 어머니의 생애를 중심으로 공부의 지도를 다시 짰다. 어머니의 삶을 통해 식민주의와 강제 징용, 한국 전쟁과 미군정, 기지촌과 한국 정부의 입양 정책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이 신체적, 정신적, 성적으로 어떤 고통을 겪었고, 이 고통은 어떤 식으로 낙인 찍히거나 묵인되었는지 살폈다. ('어떤(한국/일본/미국) 남성과 섹스하느냐, 누구에게 성폭력당하느냐에 따라 여성의 정체성이 달라진다'고 했던 정희진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한편으로 저자는 그러한 고통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가꾸었던 어머니의 모습도 소개한다. 특히 집 근처 숲에서 블루베리와 버섯을 따서 요리를 대접하고 사업까지 했던 에피소드가 무척 재미있고 인상적이었다(<파친코>에서 선자가 오사카의 한 시장에서 김치 장사를 했던 대목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쥐를 소중하게 키우고 '오키'라는 존재를 항상 의식했다는 것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대목이었다. 


제목이 <전쟁 같은 '맛'>인 만큼 음식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저자의 어머니는 저자가 공부에만 집중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부엌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김치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김치 만드는 법 만큼은 직접 가르쳐 주셨다. 어머니 말년에 저자가 생태찌개를 끓여서 대접하는 장면도 좋았다. 엄마는 나에게 어떤 맛을 물려주고 싶을지, 나는 엄마를 어떤 맛으로 기억할지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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