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는 사생활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15
장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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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내가 한두 명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를 대신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2019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장진영 작가의 장편 <취미는 사생활>은 내가 나로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다각도로 생각해보게 해주는 유쾌하고도 심오한 소설이다. 


자식 넷을 둔 엄마 은협은 위층에 혼자 사는 '나'와 막역한 사이다. 하루 종일 네 아이를 돌보느라 바쁜 은협에게 '나'는 구세주와도 같은 존재다. '나'는 은협이 바쁠 때 은협을 대신해 태권도 학원에 다니는 큰 아이 둘을 데리러 가고, 피부병에 걸린 딸을 돌보고, 막내인 갓난 아기를 챙겨준다. 그런 '나'를 은협은 언니처럼 따르고 아이들도 '이모'라고 부르며 좋아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기상이변으로 인해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다. 겨울용 이불을 찾기 위해 옷장을 살피던 은협은 결코 자신의 것일 리 없는 고가의 명품 구두를 발견한다.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게 분명하다고 확신한 은협은 '나'에게 함께 남편을 미행해 달라고 부탁한다. 전보다 더 바빠진 은협은 전보다 더 자신의 일상을 '나'에게 맡기기 시작한다. 


'나'는 은협인 척하고 아이의 학교를 찾아가 담임 선생님과 친해진다. '나'는 은협인 척하고 전셋집 주인을 상대하고, 동대표 아주머니를 만나서 입주민의 권리를 논한다. 사람들은 은협과 만났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만난 사람은 은협이 아니라 '나'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의 행위를 은협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고, 그 결과 은협의 삶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이 소설은 한국의 부동산 문제를 다룬 소설 같기도 하고, 독박 육아 문제를 다룬 소설 같기도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리플리>나 <마르탱 게르의 귀향>처럼 타인을 가장하는 삶에 대한 소설이라고 느꼈다. 더 정확하게는 내가 아닌 존재가 되고 싶은 사람의 공급과 내가 아닌 존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수요가 만나는 지점에 관한 소설이랄까.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아닌 존재가 되고 싶고, 내가 아닌 존재를 필요로 하게 만드는 사회적 조건에 관한 소설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한 사회적 조건으로 한국의 부동산 문제와 독박 육아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크게 새롭지 않은데, 남성의 아이덴티티 내지는 남성성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새롭고 재미있다.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이 궁금하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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