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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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성애자 시스젠더 여성이지만 성소수자, 트랜스젠더에 대한 관심이 많다. 비장애인이지만 장애에 대한 공부도 꾸준히 하고 있다. 이런 나를 소개하면 어떤 사람들은 "당사자성도 없으면서 왜 그런 걸 공부하느냐"라고 묻는다. 대답할 말이 궁했는데, 김승섭 교수의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를 읽고 답을 찾았다. 당사자성이 없으니까(모르니까) 알고 싶고, 알고 싶으니까 공부하는 거라고.


김승섭 교수는 주로 장애인, 성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의 건강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저자는 비장애인 이성애자 기혼 유자녀 남성으로, 자신이 연구하는 문제에 대한 당사자성이 없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하버드 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환경보건학과 부교수로 재임 중인 이력 등을 보면 한국 사회에서도 특권층에 해당한다.


저자 역시 당사자성이 없는 문제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과 회의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런 저자가 임상의사가 아닌 보건학자의 삶을 택한 건, 가난과 가정폭력으로 인해 우울증이 생긴 게 분명한데 약으로 치료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이 스스로 처했던 사건에 대해 말하는 데 필요한 언어를 가지지 못한 걸 보았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이야기하는 일을 누군가는 해야 했고, 자신이 그걸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그동안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노동자 등 한국 사회에서 아픔을 겪고도 아픔을 말할 수 없었던 존재들에게 응답하고 그들에 대해 공부하면서 겪은 문제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성소수자, 트랜스젠더 연구는 샘플 확보부터 어렵다. 힘들게 샘플을 확보해도 샘플 수 부족을 사유로 다른 연구에 밀려 지원이나 정당한 평가를 못 받을 확률이 높다.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문제에 대한 논문을 썼는데 심사자가 비장애인, 비성소수자, 남성이라면 적확한 심사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고통을 상기하는 일 자체가 고통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조사 항목에서 어떤 내용을 삭제한 적도 있다. 윤리적으로는 그것이 옳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하지만, 학문적으로는 그것이 잘한 결정이었는지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으로서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함부로 묻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지만, 학자로서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고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자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약자, 소수자의 이야기가 주로 '비참함의 언어', '슬픔의 언어'로만 공유되는 것을 경계한다. 비참하고 슬픈 면이 있는 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주목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이 책도 다루는 문제는 복잡하고 심각한 것이 많지만, 책 자체는 (저자가 오랫동안 공부한 내용을 몇 시간만에 읽어버린 게 미안할 정도로) 어렵지 않고, 다 읽고 나서 뭐라도 해보고 싶어진다. 지금의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는 무엇일까. 이 문제의 답을 찾는 것이 올해의 내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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