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믿어주는 일
미야모토 테루 지음, 이지수 옮김 / 프시케의숲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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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테루의 산문집 정말 좋다. <생의 실루엣>도 좋아서 한숨을 푹푹 쉬면서 읽었는데, <그냥 믿어주는 일> 역시 좋은 문장에 밑줄을 계속 긋다가 포기했다(가끔 밑줄을 그어야 의미가 있지, 전부 밑줄을 긋는 건 의미가 없다). 1947년 일본 고베 출신인 미야모토 테루는 1949년 일본 교토 출신인 무라카미 하루키와 출생연도와 고향이 비슷한데, 가정 환경과 성장 과정이 달라서 그런지 에세이의 내용이나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나는 미야모토 테루 쪽이 더 좋다. 


<그냥 믿어주는 일>은 미야모토 테루가 30대 후반이었던 1983년에 발표한 산문집이다. 1977년 <반딧불 강>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고 <환상의 빛>, <금수> 등의 초기작들을 발표하며 문단의 기대주로 주목받던 시절에 낸 책이다. <생의 실루엣>보다 훨씬 전에 쓴 책이지만, 두 책 모두 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쓴 책이라서 내용은 비슷하다. 야반도주를 할 정도로 가난했던 집안 사정과 부모의 불화, 장래에 대한 불안, 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과 자기 의심의 반복 등. 


물론 새롭게 알게 된 내용도 있다. 저자는 어릴 때 가난해서 책을 읽고 싶어도 실컷 읽을 수 없었다. 딱 한 번 어머니가 길거리에서 파는 중고책을 여러 권 사준 적이 있는데, 그때 산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자기 자신도 모르게 글쓰기 훈련을 했다. 열여덟 살 때는 수험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도서관에 드나들며 러시아와 프랑스 소설을 160여 편 넘게 읽었다. 덕분에 입시 준비를 할 때 애를 먹었지만, 훗날 작가가 되는 데 있어 그때 읽은 책들이 자양분이 된 것은 분명하다. 


저자는 이십 대 시절에 지독한 신경 불안 증세를 겪었다. 사람 많은 전철을 타면 증세가 심해져서 출퇴근을 못할 정도였다. 이러다 죽을 것 같아서, 그때 이미 두 아이를 둔 한 집안의 가장이었지만, 회사를 그만두고 글쓰기에 매진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글쓰기만 했더니 거짓말처럼 신경 불안 증세가 사라졌다. 그렇게 완성한 소설로 다자이 오사무 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이듬해 발표한 소설로는 아쿠타가와 상을 받았다. 병이 그를 죽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린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지금보다 훨씬 젊을 때 쓴 책이라서 그런지, <생의 실루엣>과 달리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드러나는 대목이 적지 않다. "많은 젊은이들은 그때 즐거우면 되는 것, 순간적으로 폭소가 터져 나오는 것밖에 추구하지 않게 되어 인간의 영혼과 인생의 거대함을 전하는 소설을 읽지 않게 되었다."(53쪽)라고 한탄하는 문장을 읽으며 80년대의 젊은이들도 지금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도파민 중독이었나 생각했다. 


'인간 줏대 제거 계획'이라는 글도 재미있다. "(어른들의) 목적은 하나. 다음 세대를 담당할 아이들을 결코 지적 수준이 높은 어른으로 성장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똑똑해지면 곤란하다. 자기네 뜻대로 움직일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먼저 사치와 쾌락을 부여한다. 실로 저급하기 짝이 없는 문화를 만들어내고 온갖 매체를 이용해 그 안에 푹 잠겨 있게 한다. 학력 편중 사회를 만들고 어릴 때부터 가혹한 수험 공부로 내모는 등등."(101쪽) 상상이라기에는 너무나 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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