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빛들 - 앤드 연작소설
최유안 지음 / &(앤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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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이 배경인 소설 읽으면 기 빨린다고 싫어했던 것 같은데, 올해 최유안 작가의 <백 오피스>도 읽고 <보통 맛>도 읽고, 다른 작가들이 쓴 소설도 읽으면서 오피스 소설의 매력을 알게 된 것 같다. 물론 오피스 소설이라고 다 좋아하는 건 아니고,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 일을 하면서 겪게 되는 문제들과 그것들을 해결하는(혹은 하지 못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작품이어야 공감도 되고 대리만족도 되고 공부도 되는 것 같다. 최유안 작가의 신작 <먼 빛들>에도 (내가 좋아하는) 일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잔뜩 나온다. 


이 책은 세 편의 이야기가 연작 형식으로 담겨 있다. 1편의 주인공 여은경은 한국의 모 대학 법과대학의 교수로 이제 막 임용된 상황이다. 은경은 한국계 최연소로 미국 로스쿨 교수가 되었는데, 로스쿨 동문인 설기윤 총장이 자신의 대학으로 오라고 직접 스카우트해 미국에서 이룬 것들을 모두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순간부터 은경을 괴롭게 만드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혼하라는 부모의 압박, 다른 교수들의 시기와 질투, 조교와의 마찰... 이 와중에 은경은 동료 교수의 부정을 목격하게 되고, 이를 고발해야 할지 말지 고민에 빠진다. 


2편의 주인공 최민선은 문체부 산하 기관의 정규직 직원이다. 적당하고 소소한 행복을 즐기면서 너무 튀지 않은 선에서 회사 생활하는 게 목표였던 민선의 커리어는 새로운 원장이 취임하면서 급변한다. 원장이 민선을 새로운 TF팀의 센터장으로 파격 발탁한 것이다. 졸지에 30대 후반의 나이에 센터장이라는 무거운 직책을 맡게 된 민선은 원장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이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회사 내에서 눈에 띄는 존재가 되고, 사내 정치라는 민감하고 복잡한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된다. 


3편의 주인공 표초희는 모 지방 도시에서 열리는 비엔날레의 예술 감독이다.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해 영국 유학을 마치고 막 마흔이 된 상태로 한국에 돌아온 초희는 대학 동기 재연의 소개로 감독직을 맡았다. 동년배들이 취업과 내 집 마련, 결혼, 출산, 육아 등을 경쟁하듯 해내는 동안, 자신의 꿈을 이루겠다며 유학을 택한 초희를 전 남친 윤재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초희 앞에 민혁이라는 새로운 남자가 나타난다. 초희보다 열 살 넘게 어린 것만 제외하면, 예술적인 취향, 타인에 대한 매너, 삶에 대한 태도 등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민혁을 초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설 속 여성들은 학력이나 업무 능력 면에서는 남부러울 것이 없으나, 사회 생활 면에선 어려움을 겪는다. 이는 이들의 사회 생활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에서 사회 생활을 잘한다는 건 어느 정도의 부정이나 불의와 타협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로 사회 생활을 잘 못한다는 건 정직하고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 융통성이 떨어지고 심지어는 무능하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그러니 원칙을 중시하고 양심 있는 사람일수록 사회 생활을 잘할 수도 잘 못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처하기 쉽다. 이런 상태가 지속될수록 내적인 갈등이 심해지고 스트레스가 높아진다.


다행히 이 소설에 나오는 여성들은 각자의 이야기 끝에서 각자가 만족할 만한 답을 얻는다. 그리고 그 답을 발판 삼아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답을 얻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고통스럽고 치열하기는 했지만, 결국 다들 만족할 만한 답을 얻게 되어서 좋았다. 여은경과 최민선, 표초희가 서로의 이름은 당연하고 존재조차 모르지만, 서로 알게 모르게 영향과 도움을 주고 받는 점도 좋았다. 철저히 혼자라고, 외롭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우리는 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해주는 결말이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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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이라는 게 뭔데? (중략) 성장이란, 조직에서 순화되어 결국 우두머리에 이르는 것일까. 성장을 훌륭하게 해 낸 성해윤은 민선의 경력 정도였을 때 어땠을까. 이런 딜레마를 매번 뚫고 나갔을까. 원래 지닌 성격을 잃거나 숨겨두지 않았을까. 그것이 '성장'하는 걸까. (84-5쪽) 


내가 저 회사에 얼마나 있었더라. 앞으로는 저 회사에 얼마나 있게 될까. 한 직장에 오래 있다는 말은 적응을 잘한다는 말일까 회사를 옮기기엔 충분히 유능하지 않다는 말일까. 한 사람을 오래 만난다는 말은 진득하다는 말일까 변화를 싫어한다는 말일까. 한 상사를 오래 모신다는 것은 그 상사가 좋다는 말일까 상황이 좋다는 말일까. (108쪽) 


초희의 삶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도 괜찮다는 걸 초희는 알았다. 삶은 화려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은 그저 자기 앞에 주어진 생을 꾸려 나갈 뿐이었다. 그거면 될 일이었다.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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