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무게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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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랜드는 어릴 때 삼촌의 저택에서 지도 한 장을 보고 자신의 진로를 결정했다. 그것은 지중해를 둘러싼 나라들의 언어를 전부 배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외국어 공부에 몰두한 그는 번역가로 커리어를 쌓다가 출판사 사장이었던 아내의 뒤를 이어 출판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그렇게 번역인으로 출판인으로 남은 생을 살아갈 줄 알았던 그가 어느 날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후회 없이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그는 가족이 있는 트리에스테를 떠나 자신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는 런던으로 간다. 


런던에서 레이랜드는 돌아가신 삼촌이 자기 앞으로 남긴 저택에서 지내며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본다. 그는 어린 시절 강압적인 아버지와 피상적인 학교 교육에 질려서 가출을 감행했다. 호텔의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며 외국어를 공부했고,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인정받아 번역가로 데뷔했다. 기자인 아내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아내를 따라 아내의 고향인 트리에스테로 갔다. 그곳에서 딸 하나 아들 하나를 키웠고, 현재 그의 딸은 의사, 아들은 변호사가 될 예정이다. 즐거운 삶이었지만, 몇 년 전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예전만큼 즐겁지 않다. 


삼촌의 책상에서 '이제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번역하는 일은 그만하고 너 자신의 글을 쓰라'는 내용의 편지를 읽은 후로 레이랜드는 남은 생을 자신의 글을 쓰는 데 바쳐야 할까 고민하지만, 이제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가운데 레이랜드는 이웃인 케네스 버크와 친구가 되고, 감옥에 갇혔을 때 통역해준 것을 계기로 러시아어 번역가 안드레이와 교류하게 된다. 오랫동안 신세 진 런던의 출판인 크리스티 모자에게 신세를 갚을 일도 생기고, 소설가 프란체스카 마르케세, 메리 앤과도 재회한다. 


<언어의 무게>는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제작된 원작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작가 파스칼 메르시어가 16년 만에 선보인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중요한 반전이 있는데, 그 반전이 인터넷서점 책 소개에 떡하니 나와 있는 걸 보면 반전이 아닌가 보다(반전을 모르고 읽었던 나로서는 반전을 읽고 충격이 상당히 컸기에 반전이 무엇인지 이 글에 적지 않겠다). 반전을 알기 전에는 시한부 판정 후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관한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반전을 알고 나서는 어떤 '죽음'이 존엄한 죽음인가에 관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 소설에는 배우자가 심각한 병에 걸려 의사 표현이 불가능한 경우 다른 배우자가 고의로 사망시킨다면 살인인지 존엄 상실인지에 관한 논쟁이 여러 번 등장한다. 레이랜드는 시한부 판정을 받고 나서 남은 생을 정리하는 한편으로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다량을 섭취할 경우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약을 준비한다. 이 경우 후자는 극단적 선택일까 아니면 존엄 상실일까. 목숨이 다할 때까지 사는 것과 목숨이 다하기 전에 스스로 생을 마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존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은 또한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소설이기도 하다. 시한부 판정을 받고 런던으로 돌아온 레이랜드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그동안 자신이 내렸던 선택들을 반추한다. 만약 자신이 가출하지 않고 아버지와 계속 살았다면 어땠을까. 학교를 그만두지 않고 대학에 진학했다면 어땠을까. 호텔 경비원으로 취직하는 대신 철도원이 되었다면. 아내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아내를 따라 트리에스테로 이주하지 않았다면. 아내의 뒤를 이어 출판사 사장이 되지 않았다면. 시한부 판정을 받기 전에 출판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면... 


레이랜드 앞에 선택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했지만, 레이랜드는 그중 몇 가지만을 선택했다. 선택의 결과 레이랜드의 삶은 이렇게 되었지만, 선택하지 않은 것의 결과로도 레이랜드의 삶은 이렇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생은 선택의 결과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그러니 선택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도 없고 지나치게 후회할 필요도 없는 것은 아닐까. 이제 더는 어제도 내일도, 삶도 죽음도 생각하지 않고 눈 앞의 소설에만 집중하는 레이랜드를 보니, 얼마 전에 읽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 본 "다른 인생은 없다, 지금을 살아라'라는 경구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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