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아로새겨진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7
다와다 요코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덴마크에서 언어학을 전공하는 청년 크누트는 흐린 날씨를 창 너머로 보면서 소파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을 보다가 한 여자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크누트의 시선을 고정시킨 여자의 이름은 Hiruko. 한때는 '중국 대륙과 폴리네시아 사이에 위치한 열도'였으나 이제는 없어진 나라에서 왔다고 밝힌 Hiruko는 난민 신세로 북유럽의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며 살다가 스스로 '판스카'라는 언어'를 만들었다고 한다.


살게 된 나라의 언어를 그대로 배워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자기가 살아온 나라의 언어들을 혼합해 사용한다는 Hiruko의 말에 언어학자로서 깊은 흥미를 느낀 크누트는 곧바로 방송국으로 달려가 Hiruko를 만난다. 그러자 Hiruko는 독일의 소도시 트리어에서 '우마이 페스티벌'이라는 축제가 열리는데, 축제의 주최자인 텐조라는 사람이 아무래도 자신과 같은 나라에서 온 것 같아서 이제 곧 그곳으로 갈 예정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Hiruko의 여정에 크누트가 동행하게 되고, 독일에서 유학 중인 인도인 아카슈, 트리어의 박물관에서 일하는 독일인 노라 등이 끼어든다. 이들은 국적도 다르고 모어도 다르고 여행을 하게 된 동기나 목적도 다르다. 하지만 완전히 서로를 알지 못하고 완벽하게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여행을 계속하고, 종국에는 이들처럼 고향을 떠나 낯선 나라에서 낯선 언어로 말하며 살고 있는 그린란드 출신의 텐조/나누크, Susanoo를 만나 각자의 여행의 의미를 찾는다.


<지구에 아로새겨진>은 다와다 요코의 'Hiruko 3부작' 중 첫 번째 소설이다. 다와다 요코는 1960년 일본에서 태어나 1982년 독일로 이주했다. 오랫동안 일본어와 독일어로 글을 쓰면서 문학뿐 아니라 연극, 사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다와다 요코는 이 소설에서 자신의 주요 관심사인 언어와 정체성, 경계에 대한 깊은 사유와 통찰을 보여준다.


Hiruko의 판스카는 북유럽 국가들의 언어를 섞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북유럽 사람은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지만 그 자체로 매끄럽고 완벽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Hiruko처럼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크누트처럼 기꺼이 그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는 한 판스카는 언어로 존재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언어 그 자체가 아니라 언어를 말하고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태도인 것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사용하는 호쿠사이와 모네, 후지산과 콜소스산에 대한 비유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호쿠사이의 후지산 그림을 보고 감명을 받은 모네가 콜소스산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은 후지산 그림인가 콜소스산 그림인가. 호쿠사이의 후지산 그림이나 콜소스산을 원본으로 보면 그 그림은 호쿠사이의 아류 또는 콜소스산의 복제본으로 볼 수 있지만, 모네가 그렸다는 점에선 분명한 원본이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세계가 글로벌화 될수록 모어가 무엇인지는 점점 덜 중요해질 것이다. 그보다는 자신이 지금 있는 곳에서 필요로 하는 언어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습득해서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가 중요한 능력이 될 것이다. 언어뿐 아니라 지식, 문화, 사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Hiruko처럼 나라가 없어지고 언어를 공유하는 사람이 적어져도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건 완벽함이 아니라 유연성과 담대함이다.


소설 자체는 Hiruko를 중심으로 모인 다양한 사람들의 좌충우돌 여행기라서 즐겁게 읽힌다. 인물들이 하나같이 개성적이고 단 한 명도 전형적이지 않다. Hiruko가 태어난 나라(일본)가 없어졌다는 것은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점점 더 심각해지는 기후 위기를 암시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주요 산업이 어업인 그린란드에서 더 이상 바다에서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 불황이 심해지고 주민들의 이탈이 가속화된다는 것도 이미 현실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