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지나가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3
조해진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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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중개사 사무소에서 일하는 민에게는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은밀한 취미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매물을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임대인의 디지털 도어 비밀번호를 알거나 열쇠를 복사해 임대인이 없을 때 그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알게 된 장소 중 하나가 수호를 만난 가구점이다. 오래된 쇼핑센터에 있는 폐업한 가구점에 종종 들러 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곤 했던 민은, 그곳에 자신 말고 또 다른 침입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되는데 그게 바로 수호다. 


수호는 가구점 주인의 아들이다. 가구점이 망하고 빚더미에 앉은 아버지가 집에만 있게 된 이후로 수호네 가족은 전부 돈을 벌고 있다. 하지만 신용불량자라서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일용직을 전전하던 중, 수호는 우연히 습득한 신분증을 이용해 쇼핑센터 옥상에서 운영하는 놀이동산의 피에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그러다 혼자서 놀이동산을 운영하고 있다시피 한 실장 연주에게 호감을 느끼는데, 위조한 신분과 가난한 처지 때문에 좀처럼 다가가지 못한다. 


조해진 작가의 <여름이 지나가다>의 초판은 2015년에 나왔고, 내가 읽은 버전은 2022년에 나온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리뉴얼 판이다. 조해진 작가의 소설에는 인물들이 같은 공간을 다른 시간에 점유하는 설정이 자주 나온다. <단순한 진심>에선 나나가 서영의 방을 빌려서 살고, <완벽한 생애>에선 시징이 윤주의 방을 빌려서 산다. <여름이 지나가다>에선 민이 수호의 방, 은 아니지만 가족과 관련이 있는 공간에 몰래 머문다. 


이에 대해 조해진 작가는 "도시에 살면서 느꼈던 거주지의 불안함"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는데, 조해진 작가의 소설을 쭉 따라 읽어온 내가 보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소설 속 인물이 내 방보다 남의 방을 더 편하게 느끼는 마음은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이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고, 남의 방에 살면서 방의 주인이 어떤 사람일지 추측해 보고 확인하는 과정은 타인이 입장이 되어 봐야 비로소 그 사람을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는 뜻 아닐까. 


실제로 소설에서 민은 폐업한 가구점에서 지내며 자신의 과거를 천천히 돌아본다. 파혼 후 직장을 그만두면서까지 도망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수호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증오의 마음을 멈추고 자신의 현재를 살핀다. 가난하다는 핑계로 스스로 미래를 망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추한다. 결국 각자의 잘못이 드러나고 또 다시 모든 걸 잃을 위기에 놓였을 때, 이들은 두려워하기 보다는 차라리 속 시원해 한다. 마침내 한 시절이 끝났다는 듯이. 


민과 수호에게 폐업한 가구점에서 보낸 그 시절은 누구에게 쉽게 말할 수도 없고 공감을 얻을 수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마도 각자의 삶에서 가장 고독하고 비루했던 시절에 모든 걸 내려놓고 자기 자신마저 잊은 채 온전히 쉴 수 있었던 시간과 공간은 더없이 소중하고 필요했던 것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그런 시간이 나에게는 언제였는지, 그런 공간이 나에게는 어디였는지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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