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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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는 마음은 뭘까. 소설은 고사하고 짧은 이야기 한 편 지어본 적 없는 나로서는 감히 짐작도 안 된다. 다만 어떤 소설가들은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인식한 것들만 글로 쓴다고 하고 어떤 소설가들은 체험해 본 적 없고 인식할 수 없는 세계를 글로 쓴다고 하니, 소설을 쓰는 마음이 모두 다 똑같은 건 아닌 것 같다. 시대에 따라, 장르에 따라, 소설가의 개인적인 경험에 따라 소설을 쓰는 마음이 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최은영 작가의 신간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을 읽으면서 이 소설가는 어떤 마음으로 소설을 쓸까 상상했다. 이 또한 감히 짐작할 수 없지만, 한 편 한 편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용기'였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의 화자들은 내향적이다.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하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하는 법이 거의 없다. 표제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희원은 자신의 롤모델이 되어준 영문과 강사에게 감사와 존경을 제대로 표하지 못한다. <몫>의 해진은 대학 교지 편집부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 희영에게 글 잘 쓴다는 칭찬 한 번을 못한다. <일 년>의 지수는 일 년 동안 함께 카풀을 하면서 친하게 지낸 인턴 사원 다희를 친구라고 부르지 못한다. <답신>의 이모는 조카에게 쓴 편지를 부치지 못한다. 


전하지 못한 말들은 결국 한(恨)이 되어 화자를 괴롭힌다. <파종>의 민주는 부모도 주지 않은 사랑을 베풀어준 오빠에게 고맙다는 말은커녕 오빠의 사랑을 이용한 것이 내내 괴롭다. <이모에게>의 희진 역시 부모 대신 자신을 키워준 이모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전하지 않는 것이 이모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여긴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의 기남은 자신을 배척하고 언니를 무시하는 딸 우경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지만, 비밀을 밝히는 대신 계속 숨기면서 더 큰 오해와 미움을 사는 편을 택한다. 


이 소설집의 화자들은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고 그로 인해 마음이 어떠하다고 밝힐 뿐, 직접 구체적인 행위를 해서 상대의 마음을 돌리거나 현실을 바꾸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을 읽으면서 절망이나 체념이 아닌 용기와 희망의 정서를 더 많이 느꼈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고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붙들고 있는 사람이 전부 다 놓아버린 사람보다는 뭐라도 바꿀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의 희원이 장래가 불투명한 공부를 계속하는 것, <몫>의 해진이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고 느끼면서도 여전히 글을 쓰는 것, <파종>의 민주가 싹이 날지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씨를 뿌리는 것, <이모에게>의 희진이 이모를 떠올리며 비행기를 운전하는 것,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의 기남이 우경의 아들 마이클을 한 번 더 안아주는 것 등이 그렇다. 이런 식으로 당장 눈에 잘 보이지 않고 끝내 실패로 돌아간다고 해도 계속하는 용기에 대한 이야기들이 내 작은 마음을 더 환히 비추고 더 크게 키워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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