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없는 새
정찬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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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선생님의 책(서평집)에 소설가 정찬을 좋아한다는 언급이 여러 번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원래는 정희진 선생님이 정찬의 작품 중에서 강력하게 추천한 <완전한 영혼>부터 읽으려고 했는데, 서점에 들렀을 때 이 책을 먼저 발견해 이 책부터 읽었다. 정희진 선생님이 추천하는 작가의 책인 만큼 내용이 무겁고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뜻밖에도 영화배우 장국영과 영화 <패왕별희>, <아비정전> 등의 이야기로 시작되어 금방 흥미가 동했다. 


베이징에서 중국 특파원으로 일하는 '나'는 장국영이 호텔에서 투신했다는 연락을 받고 중국인 친구 워이커씽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다. 워이커씽을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노인 정도로만 알았던 '나'는 그가 장국영뿐 아니라 첸카이거, 매염방과도 친분이 있고, 영화를 비롯한 문화 예술 전반에 조예가 깊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렇게 워이커씽과 술잔을 기울이며 배우 이야기, 영화 이야기, 음악 이야기 등등을 나누던 '나'는 자연스럽게 워이커씽이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고,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게 된다. 


워이커씽은 중일전쟁 때 난징을 침략한 일본 군인이 민간인 여성을 강간한 결과로 태어난 아이였다. 일본군의 아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를 멀리했고, 그를 키워준 외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맹인 악사만이 그를 도왔다. 맹인 악사에게 음악을 배워 연주자로 살게 된 워이커씽은 자신이 태어난 계기인 난징대학살과 중일전쟁에 관심이 많았다. 재야 역사학자로도 이름을 알리게 된 워이커씽은 어느 날 한 심포지엄에서 난징대학살을 연구하는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 아이리스 장을 만난다. 


워이커씽은 난징대학살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 하는 아이리스 장의 열의에 감동해 적극적으로 돕는다. 몇 년 후 아이리스 장의 책이 출간되고, 그의 바람대로 세계적으로 난징대학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그러나 일본 극우 세력의 비난과 공격을 견디다 못한 아이리스 장이 우울증을 앓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워이커씽은 시간이 흘러도 전쟁 범죄를 저지른 세력은 건재하며 반성은 요원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이 소설에는 난징대학살 외에도 히로시마 원폭, 일본군 성노예제, 문화대혁명 등의 사건이 언급된다. 이 사건들은 (가공의 인물인) 워이커씽과 '나', (실존했던/하는 인물인) 최승희, 매염방, 아이리스 장, 첸카이거 등의 생애와 연결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역사와 무관한 개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의 이력이나 저작, 창작물을 통해 각자의 삶에 드리워진 역사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또한 <발 없는 새>라는 제목과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장국영, 아이리스 장의 일화를 각각 소설 앞, 뒤에 배치함으로써, 역사가 빚어낸 폭력이 얼마나 무겁게 개인을 짓누르는지, 그리고 개인이 폭력의 역사를 끊기란 얼마나 어려운지(죽음으로도 불가능한 일인지)를 보여준다. 이 책과 마찬가지로 정희진 선생님의 추천으로 본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어서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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