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듣는 소년
루스 오제키 지음, 정해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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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로 서평단을 신청했고, 당첨되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을 처음 받았을 때 엄청난 두께에 놀랐고, 이걸 과연 다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다 읽으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족히 걸리겠다는 막막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런데 웬걸. 막상 읽기 시작하니 전개가 너무나 흥미롭고 결말이 궁금해서 이틀 만에 다 읽어버렸다. 지금은 국내에 출간된 루스 오제키의 다른 책을 찾는 중...(한 권 있는데 절판 상태다ㅠㅠ) 


이야기는 가난하지만 단란했던 한 가족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서 시작된다. 열두 살 소년 베니는 어느 날 믿기 힘든 광경을 보게 된다. 본명은 켄지 코니시이지만 한국인 할머니의 성을 따서 만든 예명 '케니 오'로 활동하는 재즈 뮤지션인 아빠가 트럭에 치여 사망한 것이다. 그 때부터 베니는 아빠의 목소리를 비롯해 온갖 사물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로 인해 학교 생활은 물론 하나 남은 가족인 엄마와의 관계도 힘들어진다. 급기야 정신과 병동에 입원하게 되고, 그곳에서 꿈에서 본 아름다운 소녀 알레프를 만난다. 


베니의 엄마 애너벨에게도 문제가 있다. 사서가 되기 위해 문헌정보학과 대학원에 다니다 베니를 임신하면서 그만두고 모니터링 업체에 취업한 애너벨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들이거나 수집하고 절대 버리지 않는 저장 강박 증세를 보인다. 그 결과 좁은 집에 물건이 가득 쌓여 베니와 집 주인 아들에게 지청구를 듣게 되고, 퇴거 명령을 받기 직전에 우연히 마트에서 <정리의 마법 : 잡동사니를 치우고 삶을 혁신하는 고대 선불교의 기술>이라는 책과 만난다. 


여기까지 읽고 나는 이 소설이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적인 문제를 얻게 된 아들과 엄마가 각각 새로운 사람(알레프)과 책(<정리의 마법>)을 만나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평범한 일상을 되찾는 이야기일 것으로 짐작했다. 그런데 이후의 전개는 나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퇴원 후 소음이 적은 곳을 찾다가 공공도서관으로 간 베니는 그곳에서 알레프와 기적적으로 재회한다. 알레프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알레프가 추천한 발터 벤야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의 책을 읽어 보지만, 이제 겨우 중학생인 베니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베니는 알레프에게 점점 더 깊이 빠지지만, 알레프는 베니를 귀여운 남동생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 결국 베니는 등교 거부와 가출, 자해 등 자기 자신을 해치는 선택을 반복하고, 다시 정신과 병동에 입원한다. 


애너벨은 <정리의 마법>이 눈에 띌 때마다 읽어보려고 애쓰지만 매번 잠에 빠진다. 그도 그럴 게 애너벨은 혼자서 일하면서 살림도 하고 사춘기 아들까지 키우는 상황이다. 그런데 직장에선 해고 위기에 놓여 있고, 집 안에는 물건들이 빼곡히 쌓여 있어 간단한 청소로는 해결이 안 되고, 베니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데다가 등교 거부 중이다. 도와줄 친구나 친구가 있으면 좋으련만, 스트레스가 심한 애너벨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전부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적으로 인식하고 경계한다. 그럴수록 고립은 심해지고, 집 안은 더욱 더 엉망이 된다. 


작가가 베니와 애너벨을 점점 더 힘든 상황으로 몰고 가는 이유는 뭘까. 나는 이것이 곧 '현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이나 인생을 바꿔준다는 책을 읽는 정도로는 결코 극복되지 않는다. 오히려 베니와 애너벨의 경우처럼 극심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 등의 정신적 문제를 겪거나, 학업 포기, 일자리 상실, 인간 관계 단절 등의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 


이런 베니와 애너벨을 구원하는 건, 그래도 책, 결국 책이다. 누구의 말도 듣기 싫은 베니는 도서관의 고요와 침묵을 사랑하게 된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애너벨은 <정리의 마법>의 저자에게 이메일을 쓰면서 고립감을 해소한다. 심지어 이 소설에서 책은 인쇄된 텍스트와 이미지로 내용을 전달하는 매체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사유하고 발화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사람이 사람을 버리거나 사람이 책을 버리는 일은 있어도, 책이 사람을 버리는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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