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숙녀 신사 여러분
유즈키 아사코 지음, 이정민 옮김 / 리드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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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 나는 일본 여성 작가들을 열렬히 좋아했다. 요시모토 바나나와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특히 좋아해서, 도서관에 가면 그들의 책을 서가에서 꺼내 읽으며 시간을 보냈고, 용돈이 생기면 그들의 책부터 샀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직접 돈을 벌고 페미니즘에 눈을 뜨면서 그들의 작품에 결여된 요소가 눈에 띄었고, 차츰 그들의 작품을 멀리했다. 

그런데 최근에 무라타 사야카, 유즈키 아사코, 하라다 히카 같은 일본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뒤늦게) 접하면서, 요즘은 일본 여성 작가들도 한국 여성 작가들 못지 않게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고, 가부장제와 이성애 중심주의, 성별 이분법에서 벗어난 여성의 삶을 고민하고 탐구하고 실천하는 내용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르도 코믹, 판타지, 미스터리, 스릴러 등 다양하고, 소재도 한국 작품에서는 보지 못한 것이 많다. 

유즈키 아사코의 신작 소설집 <친애하는 숙녀 신사 여러분>은 최근에 읽은 일본 여성 작가들의 책 중에서 가장 재기 넘치고 인상적이었다. 관용적 표현인 '신사 숙녀 여러분(Ladies and gentlemen)'에서 단어의 순서를 바꾸어 색다른 느낌을 준 제목처럼, 이 소설집에 실려 있는 일곱 편의 단편은 평범한 일상의 사소한 부분을 약간 비틀어서 신선한 재미를 주는 동시에 묵직한 한 방을 날린다. 

이 중에 가장 좋았던 작품은 <키 작은 아저씨>이다. 진 웹스터의 소설 <키다리 아저씨>를 연상케 하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에는 <키다리 아저씨>를 비롯한 고전 소녀 소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친구의 소개로 성형외과에 간 아코는 대기실에서 우연히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읽고 그 때부터 고전 소녀 소설 읽기에 푹 빠진다. 

아코는 <빨간 머리 앤>, <소공녀>, <작은 아씨들> 같은 고전 소녀 소설의 공통점이 '가난한 여자아이가 부자(와 사랑에 빠진다, 가 아니라)에게 도움을 받는다'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부자의 조력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부자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한다, 고전 소녀 소설 속 여자 주인공들처럼 언제 어디서나 선행을 베푼다, 부당한 대우를 당하면 참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힌다). 

결국 아코는 키다리 아저씨가 아닌 '키 작은 아저씨'의 눈에 들어 그의 조력을 받게 되는데, 조력의 내용은 '평생의 거처와 일자리 보장'이고, 조력의 대가는 결혼과 임신, 출산이 아닌 가진 사람에게 '자신의 특권을 알아차리고 갖지 못한 자와 함께 나누는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기존의 고전 소녀 소설보다는 이런 이야기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훨씬 더 유용하고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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