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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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표지에 인쇄된 '일본의 패전과 몰락 계급의 비극을 여성의 목소리로 그린 페미니즘적 작품'이라는 문구를 보고 호기심이 동해서 읽었다. 다자이 오사무와 페미니즘이라니.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인명과 개념의 조합... 책을 다 읽은 지금, 이 소설이 '일본의 패전과 몰락 계급의 비극을 여성의 목소리로 그린' 작품이라는 설명에는 동의하지만 '페미니즘적'이라는 평가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남자를 사랑하고 아이를 임신하는 것이 여성의 혁명인가. 남성 작가가 여성의 목소리로 서술하면 다 페미니즘인가. 


뒤표지의 문구 때문에 당황했을 뿐, 소설 자체는 좋았다. 배경은 패전 직후의 일본. 귀족 가문의 장녀 가즈코는 이혼 후 본가로 돌아와 몸이 약한 어머니를 모시며 살고 있다. 하나뿐인 남동생 나오지는 전쟁에 나가서 소식이 끊긴 지 오래다. 돈이 궁해진 가즈코는 삼촌의 제안을 받아들여 도쿄의 집을 팔고 어머니와 함께 이즈의 산장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곳에서 귀족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험한 일들을 해보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기는 쉽지 않고, 설상가상으로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동생이 집안의 돈을 탕진하면서 가즈코는 점점 더 힘든 상황에 놓인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가즈코는 이혼을 한 번 하기는 했지만 아직 삼십 대인 젊은 여자다. 그런 가즈코를 눈여겨본 사람들로부터 혼담이 종종 들어오기도 하는데, 그중에는 돈 많은 육십 대 남성도 있었다. 가즈코는 아무리 그래도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난다며 거절한 후, 몇 년 전 남동생 일로 술집에서 만나 충동적으로 키스를 하고 그 후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유부남 우에하라 선생에게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습니다'라고 쓴 편지를 보낸다. 


가즈코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다자이 오사무가 등장 인물의 입을 빌려서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저의 도덕 혁명의 완성입니다." 운운하는 것도 (문장의 내용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창작의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 대해 "이 (남성) 작가는 여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 "페미니즘적이다."라는 평가가 덧붙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애초에 작가가 무엇을 완벽하게 이해해서 쓰는 건 아니고, 뭘 주장하기 위해서 쓰는 건 더더욱 아니다. 하물며 다자이 오사무는 자기 부정, 자기 불신으로 유명한 작가인데. 


이 작품은 가즈코가 여성이라는 사실보다도, 몰락한 귀족 가문의 후예인 가즈코가 경험하는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신분 추락, 그로 인한 정신적 불안과 자괴감 등에 주목해서 읽는 게 적절한 것 같다. 이것이 출간 당시 일본인들의 상황 및 심정과 일치했기 때문에, 이 책이 다자이 오사무 생전에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던 작품인 것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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