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은 노래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7
도리스 레싱 지음, 이태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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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임신, 출산, 양육으로 인해 여자의 인생이 무너지는 이야기를 웬만하면 읽지 않는 편인데(읽으면 화만 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게 된 이 책은(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서 첫 장을 펼쳤다가 너무 재미있어서 끝까지 다 읽어버림) 여러모로 생각할 점이 많았다. 


주인공 메리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나약한 어머니 슬하에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난했기 때문에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하고 일찍 취업을 했으나, 메리로서는 빨리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힘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좋았다. 그렇게 삼십 대가 되도록 일하는 여성으로서 주체적으로 즐겁게 살았던 메리.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이 자신에 대해 '저 나이 먹도록 결혼도 안 하고 제정신이냐'라는 투로 험담을 하는 걸 엿듣고 성급히 결혼을 결심한다. 


문제는 메리의 남편 리처드가 메리와 성향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시골의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메리는 도시 생활을 동경했고, 가난을 혐오했으며, 남들 눈을 많이 의식하고 성취 지향적이었다. 반면 리처드는 도시 생활을 혐오했고, 다소 가난하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이들의 성향 차이는 점점 더 큰 문제를 야기하고, 결국 이들의 결혼 생활은 메리의 죽음이라는 비참한 결말을 맺게 된다. (소설 초반에 나오므로 스포일러 아님) 


애초에 메리가 이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메리가 (고작 친구들의 말 때문에 결혼이라는 중대사를 결정할 만큼) 귀가 얇고 (시골에서 가난하게 사는 게 싫어서 도시로 왔으면서 시골에서 가난하게 사는 남자와 결혼할 만큼) 생각이 짧은 사람이라서 어떤 사람과 결혼해도 불행해졌을 것 같기도 하다. (가장 큰 문제는 남이야 결혼을 하든 말든 상관할 일이 아닌데 입방아를 찧어댄 친구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데 이 소설에서 메리의 불행한 결혼 생활보다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건, (아무리 가난해도) 농장주의 아내인 백인 여성인 메리가 농장에 고용된 흑인 하인들과 겪는 갈등이다. 같은 백인이지만, 리처드는 경제적 필요에 의해 자신이 직접 고용한 흑인 하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반면, 메리는 흑인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도 보지 않고 심지어 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한다. 여성이라면 응당 어떠해야 한다는 편견(미소지니)의 희생자(피해자)인 메리가 인종 갈등의 가해자가 되는 지점이 이 소설의 백미다. 


나아가 이 소설은 메리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가난한 백인 가정(+여기에 속한 여성, 흑인들까지)의 몰락을 그림으로써, 여성 혐오와 인종 혐오, 가난 혐오 등의 온갖 혐오들을 통해 종국에는 성별과 인종, 부의 위계 서열 최상단에 위치해 있는 부유한 백인 남성들이 손쉽게 잠재적 경쟁자들을 배제하거나 탈락시키고 자본과 명예를 차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마도 이것이 1950년에 발표된 이 소설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히고 회자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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